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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Jun 22. 2020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소설 읽기

책 <덧니가 보고 싶어> 리뷰 / 정세랑 저

얼마 전 정세랑 작가의 신간 <시선으로부터,> 출간 소식이 들려왔다. '언젠가' 읽어야 할 책 리스트에 담아둔 고전을 읽어내기가 밀린 방학숙제를 해치우는 것처럼 어렵듯 좋아한다고 손꼽는 작가일지라도, 그게 구간이라면 쏟아져 나오는 신간 속 우선순위를 지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뭐든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새로운 것들에 혹하는 게 가장 쉽고 재밌으니까. 그래서 더 밀리기 전에 이참에 출간된 책을 읽어두자 싶어 그동안 미뤄두고 있던 소설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덧니가 보고 싶어>는 2011년에 출간된 정세랑 소설가의 첫 장편집이다.


두 주인공 재화와 용기의 챕터가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덧니가 보고 싶어>는 구조가 다소 특이한 소설이다. 소설가로 등장하는 재화의 챕터에서 그녀가 쓴 소설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우주에서 워프를 하는 항해사의 이야기나 툰드라의 얼음공주 같은 SF 혹은 판타지의 형식을 띤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매 챕터마다 짤막하게 그려진다. 후에 작가가 제목 그대로 50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각각의 이름을 딴 50개의 목차로 구성된 <피프티 피플>을 썼단 사실이 이쯤 되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언젠가 팟캐스트 책읽아웃에 출연하여 "독보적인 문체를 가진 소설가보다 탁월한 상상력을 가진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이 결국 <덧니가 보고 싶어>나 <피프티 피플> 같은 장편 소설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 아닐까. 정세랑 작가의 상상력은 스토리에 국한되지 않고 이야기를 담는 그릇에서도 이렇게 변화를 꾀한다.


어찌되었든 이제 괜찮다고, 용기는 지친 자신을 다독였다. 여기가 내 자리야. 꿈꿨던 직업은 아니지만 변두리의 밤을 지키는 출동 요원이 되었다. 팀 사람들도 다 맘에 들고, 격의 없는 동네 누나와 가끔 놀고, 귀엽고 꼬인 데 없는 여자친구와 데굴거리고. 더 바랄게 없다. 돌아가고 싶은 장소도 없다.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이렇게 단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장편인지라 스토리에 흠뻑 빠져들기엔 글의 호흡이 다소 짧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소설이 무엇보다 좋았던 건 공감되는 문장을 곳곳에 담뿍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SNS에서 봤을 법한, 아마 봤다면 하트를 꾸욱 눌렀을 것 같은 에피소드들이 그야말로 깨알같이 들어가 있다. 시원한 홈런 한 방은 없지만 1루수와 2루수 사이를 보기 좋게 빠져나가는 안타가 많은 소설. 그런데 그 안타가 조금도 아니고 굉장히, 정말 굉장히 많아서 책을 읽다가 자꾸 페이지 귀 접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신경이 곤두서니 사용한 기억이 없는데 켜져 있는 욕실 환기팬이라든가, 약간 벌어진 서랍 틈이라든가, 새벽에 얼핏 들은 듯한 현관문 긁는 소리라든가 하는 것들이 머릿속에서 연결되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그럴 만하지만, 쉽게 어두운 곳으로 미끄러지는 마음을 가진 편이란 걸 인식하고 있기에 객관성을 위해 선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2011년에 처음 출간된 이 소설은 2019년에 개정판으로 나오면서 수정된 부분이 더러 있다고 한다. 이번에 읽은 건 개정판이었기 때문에 위의 문장이 원래 있었던 건지 아니면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부분인지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이런 묘사가 2011년에 쓰였다면 시대를 앞서 나갔단 생각이, 개정판에서 추가된 부분이라면 "역시 정세랑!"이라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부서에는 여자가 더 많았다. 연봉이 높지 않은 것의 결과이겠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누구 하나라도 갑자기 데이트가 생기거나 하면 향수를 뿌려주고, 스카프를 빌려주고, 신데렐라의 생쥐들처럼 신나했다. 장편을 쓰고 싶은데 회사원이라고 속으로 푸념하곤 했지만, 사실 재화는 회사를 꽤 좋아했다.

정세랑 작가는 소설가 중 팬덤이 꽤 두터운 작가이다. 그 예로 신간이 나오면 팬들이 앞다퉈 한꺼번에 다섯 권, 열 권, 스무 권, 이렇게 여러 권을 구매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는 훈훈한 일화가 전해지기도 하고 트위터에는 그녀의 좋은 문장과 소식을 전하는 정세랑 봇이 있을 정도로 아이돌 같은 면모를 가진 소설가 이기도 하다. 공감 가는 글을 넘어서 이렇게 귀여운 문장마저 있으니 좋아할 수밖에.


그리하여 찾아본 신데렐라의 신난 생쥐들


놀랍게도, 이 소설은 후반부에 제목의 의미를 알아채게 될 즈음 느껴지는 서늘함이 있는데 그렇다고 암흑의 구렁텅이에 빠져 찜찜한 암시를 주는 결말로 마무리되진 않는다. 대신 작가 특유의 경쾌함과 재치로 소설은 마침표를 찍는다. 서늘함에 대해 놀랍다고 언급한 이유는 정세랑 소설가는 대부분 밝은 톤을 유지한 채 주로 희망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이 왜 좋은가'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일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작가의 이야기(책읽아웃 팟캐스트 출연분에서)처럼 목소리를 내야 하는 주제에 대해 꾸준히 같은 목소리를 내고 더불어 동물이나 환경에 보내는 따뜻한 시선을 그녀의 작품에서 숨 쉬듯 느낄 수 있는데 이런 이유로 다른 책을 읽을 때 보다 편안함과 즐거움이 동반된 독서를 가능케 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수많은 글자 사이에 숨은, 공감 가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찾는 재미가 있었던 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이제는 밀린 숙제를 하나 마쳤으니 그녀의 신간을 떳떳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책에선 또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된다. 과한 기대는 금물이라고요? 아니오, 앞서 이야기했듯 정세랑 소설가는 제게 타율이 높은 작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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