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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ak KIM Feb 16. 2023

잊혔으나 빛나는 보물, 논산 강경읍 기독교 성지

강경은 과거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서 농수산물을 비롯한 많은 물건들이 유통되었을 만큼 엄청난 영화를 누렸다. 더구나 허리띠처럼 둘러진 듯 서해를 향해 흐르금강과 맞닿음에 따라 수운 교통이 발달했고, 이는 강경을 원산 못지않은 조선 최고의 포구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던 영광은 경부선 축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발전과 철도•도로 교통의 발달로 인해 빛을 잃어갔고, 그로 인해 '읍'이라는 명칭이 무색해질 만큼 쇠락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영광을 증명하는 유산들은 여전히 이 고장을 지키고 있다. 충남 최초로 전기가 들어오고, 은행과 호텔이 문을 열었을 만큼 번성했던 강경을 두고 소설가 박범신이 '오랜 시간의 기록이고 문화이며 새날의 꿈'이라 일컬었던 것처럼.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다수 교단들(침례회, 성결회, 감리회, 천주교)의 기독교 유적인데, 지리적인 특성상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을 찾아와 선교 활동을 전개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믿음의 사람들이 남겼던 '웅혼한 전설'의 도시인 강경을, 필자는 지난 15일에 방문했다.

민족정신을 일깨우다, 강경제일감리교회

1904년, 강경제일감리교회는 덕유정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고, 1908년에 감리회로부터 첫 담임목사가 부임한다. 이 교회는 지역 최초로 사립학교인 만동학교(1908)와 만동여학교(1913)를 세웠는데, 두 학교 모두 강경의 임리정과 팔괘정에서 시작했다.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이 후학들에게 강학하기 위해 건립한 곳이 기독교 선교사들의 학교로 변신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안타깝게도 1937년,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으로 인해 두 학교는 모두 폐교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 지역 최초의 근대교육 기관으로서 주민들과 학생들에게 현실 인식을 환기시키며 일제에 맞서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을 배출한 요람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 있다.

그리고 2008년,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예배당 맞은편에 근대역사전시관을 개설했는데, 아픔 가득했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문화를 낱낱이 전함으로서 역사 인식을 새롭게 일깨움과 동시에 강경의 지역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 강경침례교회

침례교회의 시작은 1896년 2월 9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보스턴의 크라렌튼 교회에서 파송된 폴링 선교사가 강경에서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 부부와 함께 그의 집에서 드린 예배가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이 예배는 우리나라 땅에 침례교가 첫 발을 내딛게 된 계기이기도 .

이후 7차례에 걸쳐 발생한 '강경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교회는 탄압받았다. 옥녀봉에 일본인들을 위한 신사를 건축것인데, 이로 인해 교회 부지가 일제의 신사 대지로 강탈당하고, 건물은 파괴되었으며, 침례교단이 강제 해산되는 아픔을 겪은 바 있다.

현재 남교리에 있는 교회는 폴링 선교사를 파송시킨 크라렌튼 침례교회를 모티브로 지어졌고, 창립 초기 예배를 드렸던 옥녀봉의 'ㄱ'자형 교회는 복원되어 침례교단의 사적지로 지정했다.

신사참배 거부 선도 교회이자 유일무이 정사각형 한옥 교회, 강경성결교회

앞서 언급한 국내 첫 침례교회 터가 위치한 옥녀봉으로 가는 길에는 고즈넉한 한옥 한 채가 자리해 있다. 그곳이 바로 1918년 처음 개척되어 1923년에 지어진 북옥리 93번지의 옛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다.

지어지게 된 계기는 다소 엉뚱하다. 강경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 중에 일본인들이 영국 선교사 존 토마스를 무차별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로 인해 그가 받은 배상금 일부가 교회 건축비로 헌액 되어 건립되었던 것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기독교 토착화를 보여주는 정사각형의 한옥 예배당으로, 2개의 큰 기둥을 칸막이 삼아 남녀 좌석을 구분했다. 또한 건물에 기둥을 없애는 감주법이 사용되어 강단 앞의 시야가 탁 트이게 만들었다. 이후 성결교회의 이전으로 감리교가 매입했으나, 높은 역사성을 인지한 성결교단이 2012년에 다시 매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특히 강경성결교회는 앞마당에 기념비를 세울 만큼 일제 탄압에 맞서 믿음을 사수한 곳이기도 한데, 1924년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다가 한 발 더 나아가서 일본에게 유리한 내용의 역사교육 수업을 받지 않기도 했다.

결국 십계명이 금지한 '우상숭배'와 민족탄압을 저지른 일제의 만행 따르지 않은 어린 신도들은 학교에서 쫓겨나는 불이익을 겪었다. 그러나  사건은 신사참배비롯한 민족말살 정책 시행 시기를 무려 10년이나 늦추게 만들었다. 비록 탄압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으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자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 셈이었다.

수선 탁덕 ¹의 용덕 ²을 기리다, 강경성지성당

1845년, 김대건 신부는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라파엘호를 통해 목숨을 건 귀국을 했다. 강경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1달 동안 성사를 집전하며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이듬해 순교의 길을 걸을 때까지 이 땅에 믿음의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힘썼다.

그리고 1961년,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첫 사목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이 지어진다. 성당은 건축에 조예가 깊은 보드뱅 신부의 설계대로 만들어졌는데, 배를 뒤집은 듯한 아치형으로 지어진 이곳 완공 당시의 구조와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더구나 성당 옆에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았던 상해의 금가항 성당이 본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강경의 역사와 사제로서 짧았던 그의 신앙 일대기를 보여주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탄생'의 촬영을 위해 복원한 라파엘호가 바깥에 설치되어 있다.


강경을 찾아오는 방법

논산고속버스터미널에서 101번을 타고 오는 것도 좋지만, 호남선이 강경을 지나기에 기차로 찾아오는 게 더 좋다. 다만 코레일 홈페이지에서 열차 시간표를 잘 확인하고 방문하길 권한다.


¹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

² 어떠한 위험이라도 무릅쓰고 선한 일을 하는 덕


* 이 글은 강경역사문화연구원에서 제작하고 논산시에서 배포한 책자를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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