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지정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수원화성, 총길이 5.5km에 달하는 이 성은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수원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화성행궁이 있는 행궁동은 '행리단길'로 변모하여 핫플레이스로 재탄생하여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할 뿐, 수원화성은 과거 조선시대에는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민족의 독립과 교육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 그리고 식민통치 만행을 부끄러이 여기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심어준 어느 일본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필자는 지난 10월 15일 수원화성을 둘러보며 성내의 교회 3곳을 둘러보았다.
수원 최초의 개신교회, 수원 종로교회(감리교)
팔달문에서 화성 행궁을 향해 걸어가면, 행궁 맞은편에 수원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 중 하나인 '수원 종로교회'가 자리해 있다. 1894년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의 수원 방문을 시작으로 첫 발을 뗀 교회는 1907년에 과거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을 미루나무에 매달아 처형했던 순교지인 북수동 368번지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른다.
또 1902년에는 지금의 삼일학교와 매향 학교의 뿌리가 되는 남자/여자 매일 학교를 교회 안에 세워 교육에 힘쓰기도 했고, 3.1 운동 당시 많은 신도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삼일여학교 교사였던 김세환은 종로교회의 신도들과 함께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는데, 이후에도 수원 상업학교를 세우며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최근 예배당 옆에 새로 완공된 비전관에는 그의 이름을 단 예배공간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박해에도 믿음을 굽히지 않다, 북수동성당(천주교)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축조할 당시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장안동의 민가들이 헐릴 위기에 처했을 때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민가들을 성 안으로 수용하라'는 어명을 내렸던 바 있다. 이는 위정자들이 어떻게 백성을 섬겨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조대왕 사후, 그의 정치무대나 마찬가지였던 수원화성에는 '무당 짓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학 쟁이만은 되지 말아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곳이 되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되려 자신들을 향해 매질하는 포졸들을 걱정할 정도로 담담하게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종로교회처럼 신도들이 순교한 토포청 터에 세워진 북수동성당은 현재 순교성지로 선포되었고, 수원화성 일대에서 자행되었던 천주교 박해를 기리고자 도보로 순례할 수 있도록 가이드도 마련하였다.
사랑을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일본인, 수원 동신교회(기독 동신회)
화성행궁 맞은편의 종로교회와 북수동성당을 벗어나 수원천을 따라 걸어가면, 화홍문 근처에 흰색의 작은 교회가 있다. 그곳이 바로 노리마츠 마사야스라는 일본인에 의해 세워진,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수원의 동신교회이다. 노리마츠 목사가 우리나라 땅에 도착한 시기는 1896년으로, 을미사변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지금보다 훨씬 컸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수원 땅에 '성서강론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세운 1900년부터 세상을 떠난 1921년까지 일제의 압제를 비판할 만큼 조선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었고, 심히 빈곤했던 상황 속에서도 자신보다 더 곤궁한 상황에 처했던 이웃들을 돌보았다. 지금 그의 유해는 생전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기념비와 함께 동신교회 경내에 잠들어 있다. 노리마츠 목사의 이야기가 지금껏 많은 이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 왜곡과 혐한 발언을 비롯한 여러 문제로 한일 관계가 얼어붙은 지금이야말로 그의 사랑과 희생정신을 되새겨 볼 때라고 생각된다.
수원화성으로 성지순례 가는 길
앞서 소개한 3곳의 교회가 자리 잡은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수원시내 한복판에 있는 유명 관광지인 만큼, 대중교통으로 찾아오기 매우 편하다. 기차를 타고 온 경우 수원역에서 매산시장까지 도보로 이동 후 11번 버스를 이용해 팔달문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고속/시외버스를 탄 경우 수원터미널에서 112번 버스를 타고 팔달문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