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가 명확한 연출, 그 덕분에

유한한 무대 위 무한한 해석의 자유

by 강 산

뮤지컬은 연출에 제약이 많다. 예산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기술이 낙후돼서도 아니다. 단순히, ‘라이브 무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주는 물리적인 한계다. 만약 뮤지컬에서 한 커플이 카페에서 대화하고 있는데 커피 잔의 떨림을 강조하고 싶다면? 영화는 클로즈업을 쓰면 된다. 잔의 흔들림, 커피의 파동, 그 잔을 감싼 손의 미세한 긴장까지 아주 세밀하게 잡아낼 수 있다. 소설은 더 자유롭다. “컵 아래 그려진 갈색 고리와 떨리는 손끝”—한 문장으로도 사람의 감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뮤지컬은 다르다.

그 컵을 강조하려면 배우가 직접 떨리는 손으로 들어 올려야 하고, 조명은 그 손에 스팟을 비추며 주의를 유도해야 하며, 다른 배우들은 알아서 암전되거나 정지해야 한다. 이걸 매 장면마다 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뮤지컬 무대는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커피를 마시는 연인도, 그들을 훔쳐보는 조연도, 뒤에서 분주히 지나가는 앙상블도. 한 장면 안에 수많은 감정선과 행동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이 단점이 뮤지컬의 매력을 반감시키냐고? 전혀.

오히려 나는, 이 제약 덕분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모든 걸 다 지정해서 보여주는 연출보다, 어디를 볼지 내가 고를 수 있는 연출을 좋아한다.

박물관에 가서도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라는 설명을 듣기보다는, 혼자 돌아다니다가 어떤 작품에 ‘탁’ 꽂히면 그제야 정보를 찾아본다. 어떤 시점을 따라가는 것보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감각이 훨씬 흥미롭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나는 놀이기구는 죽어도 못 타지만, 공포영화는 꽤 즐겨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포를 당할 것인가, 다룰 것인가.

놀이기구는 일단 탑승하면 끝이다. 안전바가 내려가는 그 순간부터 내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다. 무섭다고 소리쳐도, 울어도, “내릴래요!” 외쳐도 소용없다. 그냥 끝날 때까지 온몸으로 공포를 무력하게 막아낼 수밖에.


하지만 공포영화는 다르다.

무서우면 눈을 감으면 된다.

귀를 막아도 된다.

정 안 되면 뛰쳐나가도 된다.

아니면—감독이 정한 배경음악 대신 내가 고른 음악을 틀어도 된다!


실제로 한 번은, 공포 영화를 보다 속 살인마가 칼을 들고 주인공을 좇는 장면에서 숨이 턱 막혀왔다.

카메라는 주인공의 눈동자와 살인마의 발끝을 번갈아 잡으며 심장을 조여 오고, 두 인물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배경 음악의 박자도 함께 고조됐다. 나는 의자에 얼어붙은 채 화면에 빨려 들었고, 순간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나 쫓기고 있는 거지? 도망쳐야 되나?’ 스크린은 저 멀리 있는데, 숨 막히는 공포는 정확히 내 목덜미 뒤에서 느껴졌다. 그건 영화가 아니라, 생존 게임에 가까웠다.


몰입하다가 정말 내가 죽겠다 싶어, 가방에서 에어팟을 꺼내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를 틀었다. 첫 비트가 터지는 순간, 내 머릿속에 조명이 확 켜졌다. 제니의 목소리가 불길한 배경음을 밀어내자, 화면 속 살인마가 마치 뮤직비디오의 댄서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눈앞의 장면은 그대로인데, 감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쫓기던 나는 어느새, 씬을 리드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뿌듯했다.

공포에 질려 있던 내가, 단 한 곡으로 그 장면을 리믹스했다.




이처럼 나는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 시점을 새롭게 조정할 수 있는 서사를 좋아한다. 그래서 뮤지컬 무대는 나에게 최적의 콘텐츠다. 모든 것이 펼쳐져 있고, 어디에 집중할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으니까.


무대의 중앙을 볼 것인가, 배경 구석의 연출을 따라갈 것인가.

주연의 감정선에 몰입할 것인가,

아니면 말 한마디 없이 옆에서 무대 바닥을 닦는 시늉을 하는 앙상블에게 시선을 줄 것인가—전부 내 선택이다.


책처럼 작가가 묘사한 부분만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처럼 카메라가 보여주는 시점에 갇히지도 않는다.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 그대로 오픈되어기에, 감상 또한 열려있다.


결국, 내가 고개를 돌리는 방향이 곧 나만의 클로즈업이다.


예를 들면,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주인공 커플이 카페를 나선 뒤 벌어지는 짧은 장면이 있다. 앞 장면에서 한껏 뜨겁던 감정선이 빠져나가고, 무대에는 동네 사람—정확히 말하면, 그 마을의 ‘감초 부부’가 등장한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자, 아내가 뜬금없이 묻는다.

“내가 바람피우면 어떻게 할 거야?”

남편은 능청스럽게 받아친다.

“그런 일은 없어.”

관객석에 웃음이 번지는 그 순간, 진짜 재미는 주변 테이블에서 벌어진다.


같은 공간 속 앙상블들이 모두 커플로 등장해, 마치 그 부부의 대화를 따라 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누군가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조용히 잔을 들며 눈짓을 주고받는다. 어떤 커플은 순간 어색하게 눈을 피하고, 또 다른 커플은 입을 삐죽 내민다. 모두 같은 장면을 연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각 테이블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더 재미있고, 더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이 모든 리액션이 현재 바람을 피우고 있는 주인공 커플이 막 자리를 떠난 직후라는 점이다. 즉, 무대 위 모든 사람이 그들의 대화 내용을 이미 알고 있고,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 짧은 연출 하나로 ‘비밀이 없는 시골 마을’이라는 배경 설정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고통을 호소하며 노래를 부를 때, 나는 종종 반대쪽에 서 있는 조연을 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의 표정엔 이야기가 있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 잠깐 돌아보는 시선, 그 짧은 눈빛 하나가 전체 서사에 작은 균열을 만든다.


그리면 나는 그 틈에 들어가 나만의 서브플롯을 만들어낸다.

“저 조연, 사실 저 둘 중 한 명을 좋아하고 있는 거 아냐?”

“지금 저 표정, 분명히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그렇게 나는 무대를 ‘보는’ 동시에 ‘연출’한다.

물론 무대 위 모든 정보가 완전히 해석 가능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애매함, 정해지지 않음이 주는 여백이 너무 좋다. 누가 정답을 말해주지 않기에, 내 마음대로 상상해도 된다. 그 불완전함이 나에겐 자유다.


어떤 날은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무대 위 그 장면, 내가 집중해서 본 그 표정, 조명 속에 잠깐 비친 팔의 떨림. 그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나만의 장면’이었다. 어쩌면 그 배우도 기억 못 할 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마음에 저장한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장면을 내가 발견했다는 만족감. 작은 디테일 하나로 촘촘히 쌓아 올리는 나만의 해석.

뮤지컬은 그렇게 나를 관객이자 연출가로, 해석자이자 창작자로 만든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뮤지컬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자유롭고,

제한이 많아서 더 풍부해지는,

이 기묘한 장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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