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모자란 사람만 사랑할까

완벽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나를 용서한다

by 강 산

나는 사실 로맨틱 코미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 지나치게 매끄럽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특히 그 안에 등장하는 신데렐라 서사.

대대로 이어지는 부를 지닌 집안에서 태어나,

실패의 그림자조차 닿지 않는 남자주인공이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서 있다.

명품 브랜드가 그의 전신을 감싸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정제된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며,

언제 어디서나 적절한 목소리 톤으로 자신감과 배려를 동시에 드러낸다.

그리고 그 위에, ‘까칠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녹아내리는 남자’라는

무척 계산된 성격이 덧입혀진다.


그를 볼 때마다 묘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마치 스크린 속 인물이 아니라, 광고 속 모델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그는 늘 완벽하다.

재력도, 외모도, 심지어 화내는 타이밍까지 완벽하다.

그러나 그 완벽함이 내겐 설렘이 아니라

어딘가 불쾌한 정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의 갈등은 언제나 얄팍하다.

겉으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 보이지만,

그 싸움의 본질은 사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다.

주인공에게 결점이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불행은 언제나 바깥에서 찾아온다.

시어머니의 반대, 질투하는 친구, 음모를 꾸미는 경쟁자 같은 인물들.

그들은 극단적으로, 그리고 자극적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완전무결한 주인공의 세계에서

갈등이란 오직 외부에서만 공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구조는 완벽한 신화 속 유니콘과,

그를 우리에 가두려는 악마의 무리라는 도식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세계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그들은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흔들림이 없다.

모든 위기는 스쳐 지나가듯 해결되고,

사랑은 언제나 정답처럼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갑다.


“완벽한 모습만 보면 되지,

왜 그런 것까지 생각하느냐”고 누군가는 묻겠지만

나는 도저히 그들의 표정을 신뢰할 수가 없다.

내 기준에서 완벽한 재벌 남자주인공이란,

하루 종일 웃기만 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웃음은 원래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도,

24시간 내내 웃고만 있다면 어떨까.

그 순간 그 미소는 따뜻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뜩함이 된다.

나는 그 웃음에서 인간의 온기가 아닌,

기계적인 반복의 냉기를 느낀다.


마치 불쾌한 골짜기에서 만나는 로봇처럼.

표정은 살아 있는데,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 완벽한 미소의 경계에서,

나는 차갑고 싸한 이질감에 휩싸인다.




무대 위의 ‘미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 이유


그래서일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뮤지컬 무대 위에서

미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의 기준에 미달하는 인물이다.


누군가는 친구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내던진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앙리 뒤프레가 그렇다.

그는 혁명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친구 빅터를 위해

“내가 했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스스로 사형을 택한다.


그런데 진짜 미친 놈은 따로 있다.

그 친구를 다시 살려보겠다고, 그의 머리를 다른 시체와 봉합해

“인간 창조”를 시도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죽은 이를 되살리겠다는 집착,

그가 만든 괴물은 결국 그의 죄의식이자, 인간에 대한 역설이었다.

완벽한 인간을 만들려던 사람은, 결국 가장 불완전한 존재를 만들어낸 셈이다.


또 다른 무대에는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남은 병사가 있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한 병사는

끝없는 포로생활 속에서 정신이 무너져가다가,

결국 상상 속의 인물 — ‘여신님’을 만들어낸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식사를 나누며, 기도를 드린다.

세상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현실이 아닌 믿음을 발명했다.

그에게 여신님은 허상이 아니라, 살아남을 이유였다.

그 허망한 믿음 덕분에,

그는 끝내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의 에반 핸슨.

전 세계에 거짓말을 한 소년이다.

그의 거짓말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죽은 친구의 엄마가, 에반의 편지를 보고

“너와 내 아들이 친했구나”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고백 하나가 폭풍처럼 세상을 휩쓸었다.

에반은 영웅이 되었고,

그의 거짓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는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불완전한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그 복잡한 진실 앞에서, 나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거짓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사랑받아본 사람’의 몸부림이었으니까.


이 미친 사람들은,

모두 다른 얼굴의 상처를 갖고 있다.

죽음, 전쟁, 외로움, 죄책감.

그들은 이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벽 앞에서

결국 노래를 부르며 그 벽을 부순다.

그들의 감정은 지나치게 크고, 지나치게 불안정하다.

하지만 그 불안정함 속에만 진짜 인간의 체온이 있다.

그 뜨거운 온기가,

나는 너무 좋다.


뮤지컬 속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그들은 욕망에 충실하고, 사랑 앞에서 비겁하며,

때로는 자신이 만든 거짓에 스스로 질식한다.

그러나 그 모든 혼란과 모순이

무대 위에서는 눈부신 ‘진심’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노래는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는 울음을 품고 태어난 언어다.

누군가 노래를 부를 때, 그가 감춘 상처는

어김없이 음의 떨림 속에서 드러난다.

뮤지컬이란 결국,

자신의 결점을 ‘음악으로 고백하는 예술’이다.




헤드윅, 상처의 화신이자 용기의 상징


그중에서도 헤드윅은 내게 특별하다.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경계 위의 존재다.

사랑을 원했지만 세상은 그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고,

자유를 꿈꿨지만 결국 누군가의 손에 의해 몸이 잘려나갔다.

그의 몸은 찢겼고, 이름은 지워졌고, 삶은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화려한 가발을 쓰고 무대에 올라,

세상이 숨기라 말했던 자신의 상처를 전부 드러낸다.

그건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고백이다.

“이게 나야. 그래도 나는 계속 살아.”

그 한 문장으로 관객석이 멈춘다.


나는 그 장면에서 늘 숨이 막힌다.

그의 눈빛은 두려움과 도전, 체념과 희망이 모두 섞여 있다.

그럼에도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 용기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완벽한 사람은 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가발을 쓴다는 것, 그리고 진짜 자신을 마주한다는 것


<헤드윅>에서 내가 가장 많이 운 장면은

‘Wig in a Box’를 부를 때였다.

그는 화려한 가발을 하나씩 꺼내며 노래한다.

오늘은 금발의 자유로운 여인, 내일은 푸른 머리의 예술가.

가발을 바꿀 때마다 그는 잠시 다른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 노래의 끝에서, 그는 결국 묻는다.

“이 중에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가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단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자유를 얻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의 자유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그래서 가발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그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또 하나의 얼굴이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울었다.

그의 외로움이, 마치 내 안의 외로움을 정면으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사랑은 상처와 함께 온다


헤드윅과 이츠학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날카롭고,

증오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간절하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찌른다.

그들의 상처는 서로의 몸에 새겨져 있고,

그럼에도 그들은 끝내 무대를 함께 선다.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도 결국 이렇게 생겼겠지.”

서로를 이해하려다 상처 주고,

상처를 두려워하다 멀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다가가 손을 잡는 일.

그게 인간의 사랑이다.


뮤지컬 속에서 이츠학이 가발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

그리고 헤드윅이 가발을 벗고 웃는 장면은

같은 진심의 다른 얼굴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결점을 함께 껴안는 일이라는 걸.




완벽하지 않은 그들을 사랑하면서


뮤지컬 속 결점 많은 캐릭터들을 사랑할수록,

나는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실패하고, 후회하고, 무너진다.

그럼에도 다음 장면에서 다시 노래를 부른다.

그게 내겐 너무 아름답다.


완벽한 사람은 영원히 노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음악 대신 침묵을 택한다.

하지만 불완전한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상처를 입은 채로,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노래한다.

그 목소리 속에는 살아 있음이 깃들어 있다.


뮤지컬을 본다는 건 결국,

그 살아 있음의 떨림을 내 안에서 다시 느끼는 일이다.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나는 조금 덜 두려워지고,

조금 더 솔직해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주문


커튼콜의 순간, 배우들이 조명 아래 서서 웃는다.

그들의 얼굴엔 화장이 번지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건 완벽함의 미가 아니라,

진심이 끝까지 다해진 얼굴의 미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 안의 결점들이 잠시 조용해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진심으로 믿어진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뮤지컬을 본다.

그들의 상처를 통해, 나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결점 많은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결점 많은 나를 조금씩 용서하기 위해.

“완벽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건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이었다.

뮤지컬은 그 연습의 무대였고,

나는 그 무대의 조용한 관객이었다.

이전 02화억지로 울다 진심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