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울다 보니, 함께 울게 되었다
삶의 축이 ‘턱’ 하고 어긋나는 순간들이 있다.
퍼즐 조각 하나가 맞춰진 게 아니라, 그 바깥에 있던 액자틀을 처음 본 순간처럼.
지금껏 선명하다고 믿었던 기준이 흐릿해지고, 시야의 경계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내게 그런 순간은 “베어 더 뮤지컬” 속 남자주인공의 눈물이었다.
그는 고등학생이었고, 애인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고, 그 여자가 임신을 해버렸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이를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결국 그녀를 밀어냈다.
거기까진 뭐, 놀랍지만 그럴 수도 있다 치자.
문제는 그다음이다.
애인에게 들킨 남자주인공은 미안해하기는커녕, 화를 냈다.
아니, 뭐? 지금 화낼 타이밍은 아니잖아?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이해 불가’라는 딱지가 붙었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찌질하기까지 한 남자.
나는 그를 단숨에 ‘공감 불가 캐릭터’로 규정했다.
그리고 무대 위 그는, 울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황당했다.
‘왜 울지?’ 그게 내 솔직한 반응이었다.
애인에게 화내고, 책임 회피하고, 이제 와서 갑자기 슬프다고 눈물 흘리면 단가?
무대 위 배우는 절절히 울었고, 관객석의 나는 콧대를 세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대 밖에서 엄격한 재판관이었다.
내 안의 ‘상식’과 ‘논리’라는 법전을 펼쳐 들고, “유죄”라고 판결을 내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공연은 클라이맥스로 향했지만, 나의 몰입도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감정선은 내게 한 발짝도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조금 억울해졌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데.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츄파춥스로 허기를 때웠고,
초입인 길을 헤매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관객석에 앉아 조명을 기다렸다.
어떻게 얻은 소중한 시간인데, 이렇게 건조하게 극장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주인공이 울면 나도 울어보기.
이해가 안 되더라도, 흉내라도 내보는 거다.
웃으면 따라 웃고, 분노하면 같이 눈썹을 찌푸리고, 눈물을 흘리면 내 눈물샘도 두드려보기.
무대가 나를 흔들어주지 않으니, 내가 먼저 흔들려 보기로 했다.
당연히 처음엔 잘 안 됐다.
눈물샘은 좀처럼 정을 주지 않았다.
감정은커녕, 감정 ‘흉내’조차 그럴듯하게 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 작게… 울컥하는 무언가가 올라왔다.
계속해서 억지로라도 감정을 따라가자, 정말 신기하게도 눈물이 났다.
한 방울.
억지스럽고, 얄팍하고, 연기 같기까지 한 눈물이었지만,
그 한 방울이 내 안에 꽉 막혀 있던 댐을 슬쩍 건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뚝’ 하고 열렸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느새 심장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
후회, 죄책감, 자책, 자괴감, 미안함, 혼란스러움.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무력감.
감당하기 어려운 모든 규탄과 스스로에 대한 분노.
그 모든 감정이 마치 물에 번지는 먹물처럼,
심장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결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뇌까지 올라왔다.
나는 지금껏 머리로 이해한 뒤에야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먼저 흔들린 건 심장이었고,
이해는 그 뒤늦은 진동에 실려 도착했다.
이해되지 않았던 남자주인공의 감정들이
실체를 띠고 내 안을 휘저었다.
그저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을 뿐,
그가 느끼는 고통은 실제였고, 깊고, 선명했다.
나는 그 사실을, 단 한 줄기의 눈물로 처음 알게 됐다.
억지로 시작된 눈물이,
결국은 나를 진심으로 울게 만들었다.
그 순간, 내 삶의 공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나는 항상 머리로 이해한 뒤에야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논리 → 공감. 그게 나의 내비게이션이었다.
하지만 그날, 내 감정은 정반대로 흘렀다.
공감 → 이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상식이 깨지는 경험이랄까.
이게 바로 공감이구나.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이 아니라 감정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걸, 뮤지컬이 몸소 가르쳐줬다.
그것도 말 한마디 없이.
지금도 MBTI에서 T로 분류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내가 F라고 오인한다.
아마 내가 잘 웃고, 잘 울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나는 감정이 충분히 분석되고, 구조화되어야만 반응하던 사람이었다.
위로하기보다는, 잘잘못부터 따지는 사람이었다.
“그건 네가 잘못한 거 아냐?”
이건 내가 진심으로 건넨 말들이었다.
그랬던 내가, 베어 더 뮤지컬 이후로는, 적어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짧은 말이 가져오는 변화는 꽤 크다.
그 후로는 자꾸만 주변 사람들의 감정이 눈에 밟혔다.
한 마디도 안 했지만 입꼬리가 살짝 내려간 친구의 표정,
그냥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어깨를 움찔거리는 후배의 반응.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 감정이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바로 공감이었다. 이유 없는 눈물을 같이 흘리는 일.
나는 그날 이후로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이해는 늘 나중에 온다. 아니, 평생 안 올 수도 있다.
그게 인생이다.
나중에 이 경험을 심리상담사에게 털어놨더니,
놀랍게도 실제 심리 치료 기법 중 하나라고 했다.
‘공감을 배우기 위해 타인의 감정을 모방하는 것.’
마치 내가 무대 위 배우의 감정을 따라했던 것처럼.
억지였던 감정이 어느 순간 진심이 되어버리는 그 과정.
이해가 아닌 모방에서 출발했지만,
그 끝엔 누군가의 고통에 나도 함께 서 있는 나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슬쩍 가르쳐준다.
말 없이, 이론 없이, 직접 겪게 하며.
뮤지컬이 아니면 도저히 배울 수 없었을 방식으로.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말 한 마디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뒤흔드는 대사일 수 있다.
나에겐 A4 반 장이면 충분한 감정이, 어떤 사람에겐 평생 설명해도 모자란 무게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뮤지컬은 나에게 그걸 가르쳐줬다.
노래로, 눈물로, 때로는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오는 스토리로.
모든 감정은 이해되어야만 진짜인 게 아니다.
그저 느껴졌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진짜다.
그리고 그 감정의 진실성을 믿어주는 것이야말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첫 걸음 아닐까.
그러니까 결국, 내가 뮤지컬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모든 게 논리적으로 정리되지 않아도, 그냥 그 마음을 믿어볼 수 있게 해주니까.
그게, 이 기묘한 장르가 가진 소중한 마법이다.
가끔은, 이유 없는 울음이 가장 진실한 이해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무대를 향해 걸어간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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