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조언
2023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나는 초콜릿 대신 눈물을 받았다.
그날,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얼굴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다.
감정이 벅차올라 한동안 자리에 앉은 채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나는 ‘조언’을 들었다.
그 어떤 책보다, 그 어떤 명상보다도 깊이,
뮤지컬은 내게 삶의 방향을 일깨워 주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인생 교과서를 가지고 산다.
누군가에게는 성경이, 누군가에게는 철학서가, 또 누군가에게는 부모의 말씀이 그렇듯.
나에게 그 교과서는, 언제나 뮤지컬이었다.
무대의 조명 아래에서 배우가 노래를 시작하면,
내 안의 불안과 고민이 기이하게 정돈된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단순한 가사가 아니다.
그건 ‘조언’이다.
“괜찮아, 너 지금 잘 가고 있어.”
“이 길이 틀려 보여도, 결국 너답게 가면 돼.”
이런 말들을 노래로, 감정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알려준다.
작년에 본 <헤드윅>도 그랬다.
그 무대 위의 외로움과 자아 찾기의 여정이, 내 안의 방황과 겹쳤다.
뮤지컬은 늘 그렇게 나를 찾아온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무대는 내게 “이리 와, 여기서 잠깐 숨 쉬어” 하고 손을 내민다.
<여신님이 보고계셔>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이 우연히 무인도에 표류하며
‘여신님’이라는 상상의 존재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다.
처음엔 단순히 ‘감동적인 전쟁극’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신님은 내 안의 질문에 대답을 건네고 있었다.
요즘 나는 ‘나’를 너무 효율적으로 다루려 하고 있었다.
감정을 사사롭다 여기며, 스펙과 성취를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미움도, 슬픔도, 외로움도 다 낭비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던 내게,
극 중 남북 병사들이 허상이라 생각했던 여신님을 통해
진짜 살아갈 이유를 찾는 장면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들의 허상이 곧 진짜 위로의 실체가 되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붙잡고 있는 목표들은,
정말로 내가 힘들 때 나를 지켜줄 만큼 소중한 걸까?”
뮤지컬을 보다 보면 ‘나의 삶의 지향점’을 묻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성공을,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신념을 붙든다.
하지만 무대 위 인물들은 언제나, 가장 인간적인 이유로 살아간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의미’보다 ‘사람’이다.
동료의 손, 잃어버린 이름, 한때의 웃음.
그런 것들이 삶의 방향이 되어 준다.
나 역시 돌아봤다.
내가 ‘가치’라 부르는 것들 — 정량화된 "점수", 커리어, 자산 —
그건 물론 중요하지만, 나를 지탱해주는 건 아니었다.
힘들 때 떠오르는 건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함께 울고 웃었던 친구,
꿈을 말할 때 진심으로 들어주던 누군가,
그리고, 나 자신.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목표로 삼은 가치는,
내가 힘들 때 나를 안아줄 만큼의 가치일까?”
⸻
<여신님이 보고계셔>의 마지막 넘버가 시작될 때,
극장 전체가 숨죽였다.
“미움도 슬픔도 외로움도~ 그녀 숨결에 녹아서 사라질 거야.”
그 순간, 그 노래는 단순히 캐릭터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건 내 마음의 기도였다.
삶을 버텨내는 데는 신념이 아니라 감정의 기억이 필요하다는 걸,
뮤지컬은 매번 내게 상기시킨다.
그 노래가 끝날 때쯤이면,
나는 조금 더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간다.
뮤지컬은 늘 내게 ‘조언’을 건넨다.
말로 하지 않아도, 노래와 표정, 그리고 침묵으로.
그 조언은 늘 이렇다.
“너는 충분히 잘 살고 있어.”
“다시 사랑해도 괜찮아.”
“가끔은 울어도 돼.”
사람마다 조언을 듣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이는 상담실에서, 어떤 이는 책에서,
그리고 나는, 뮤지컬 극장 4열, 중앙 자리에서 듣는다.
그래서 오늘도, 표를 예매한다.
다음 조언을 들으러,
다음 무대 속 나를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