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앙코르가 없다

그리움과 소중함은 서로의 그림자처럼 닮아 있다

by 강 산
2018년, 그 시절 빛바랜 화질과 색감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내가 이 작품을 처음 만난 건 2018년의 일이었다. 대학 시절, 우연히 예매 사이트를 기웃거리다 발견한 공연이었다. 화려한 대극장 뮤지컬처럼 거대한 무대 장치도 없고, 유명 배우의 이름도 걸려 있지 않았다. 혜화의 어느 소극장에서 열리는, 혼자 사는 할머니와 그 집에 배달된 도우미 로봇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막이 오르고, 무대 위의 작은 조명이 배우들을 감싸 안자, 나는 금세 이 작품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로봇의 서툰 대사들이 유난히 따뜻하게 다가왔던 것만은 확실하다. 어떤 장면은 꼭 오래된 앨범을 펼쳐 보는 듯했고, 어떤 대사는 잊고 지내던 감정을 불쑥 불러왔다. 극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눈물이 고여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이 작품을 다섯 번이나 보았다. 혜화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설레었다. 매번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다른 계절과 다른 마음으로 극장을 찾아가면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친구의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듣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처럼. 어느 날은 홀로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고, 어느 날은 부모님을 모시고 가서 공연이 끝난 뒤 조용히 “좋았지?” 하고 물으며 웃었다. 대답보다 더 따뜻한 건 그 순간의 공기였다.


당시 나는 이 작품과 완전히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인스타그램 프로필도, 카카오톡 사진도 포스터로 바꿔 달았다. 지금은 잊힌 옛 계정에 여전히 그 사진이 남아 있다. 내 삶의 한 시기를 가장 잘 증명해 주는, 작은 흑백 도장처럼.


그런데 2021년, 재연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어린 시절 첫사랑을 다시 만난 사람처럼 설레었다. 설마 다시 볼 수 있을까 싶던 극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니. 티켓을 손에 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막상 극장을 나올 때 내 손에 남은 건 기쁨이 아니라 묘한 상실감이었다.


연출이 바뀌고 제작사가 달라지면서, 내가 기억하던 장면들은 거의 사라졌다. 할머니의 표정은 달라졌고, 로봇의 대사도 변했다. 내가 좋아했던 넘버는 아예 삭제되거나 새로운 멜로디로 대체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을 울리던 장면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빛나던 조각이 지워진 것이다. 객석에 앉아 그 변화를 마주했을 때, 나는 마음 깊은 곳이 꺼져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그리워한 사람이 전혀 다른 얼굴로 돌아온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날의 슬픔을 곱씹었다. 왜 이렇게 허무했을까. 곧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단순히 ‘작품’이 아니라, 그 공연을 보던 그때의 나였다는 것을. 2018년의 겨울, 혹은 여름, 혹은 부모님과 함께했던 어느 밤. 그 순간들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사랑했던 무언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설령 같은 제목으로 다시 태어나더라도, 같은 순간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이 예술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공연의 막이 내리듯,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닫힌다. 아무리 원해도 다시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그 소중함은 그리움과 다르지 않다.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과거의 순간은 더욱 귀해지고,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 또한 귀하게 여겨진다.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내게 단순한 뮤지컬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소중함’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처음으로 이해하게 해 준 경험이었다. 무대 위의 로봇과 할머니가 그려낸 사랑은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고, 변하지 않는 초상처럼 남아 있다. 이제 나는 공연을 떠올릴 때마다 아쉬움 대신, 그때 흘린 눈물과 웃음을 떠올린다.


소중함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 모른다. 영원히 붙잡을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서 다시는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 언젠가 또 다른 공연이 내 앞에 나타나도, 나는 알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그 깨달음 덕분에, 오늘의 무대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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