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에 빠져서 이것까지 해봤다

뮤지컬 덕질이 만든 인생 최대의 독서 기록

by 강 산

뮤지컬을 사랑한다는 건, 단순히 노래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 사랑 때문에 벽돌책 하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론 처노의 《Alexander Hamilton》, 무려 1428쪽.

내 생애 가장 긴 책이었다.



1. 설레는 벽돌책


보통 나는 단편을 선호한다.

한 손으로 쥐고 읽을 수 있고, 버스 안에서도 덮기 쉽다.

벽돌책은 다르다. 두께부터 나를 압도한다.

책이 아니라 의지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뮤지컬 〈해밀턴〉의 시발점,

린 마누엘 미란다가 바로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지 않은가.


그 사실을 알고 난 순간,

나는 도서관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 혼자 방방 뛰었다.

“이게 바로 그 책이야!”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싸인 CD를 발견했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2. 모든 것은 ‘Satisfied’에서 시작됐다


2023년, 나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뮤지컬 〈해밀턴〉의 넘버 ‘Satisfied’를 듣게 되었다.

한 번 재생했을 뿐인데,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은 온통 “To the groom! To the bride!”였다.


그 노래엔 광기 어린 속도와 섬세한 감정이 공존했다.

랩처럼 쏟아지는 가사 속에서,

한 여자가 ‘사랑하지만 양보하는’ 복잡한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이란 얼마나 냉정하고 뜨거운 감정인지

몸으로 느껴졌다.


결국 나는 디즈니플러스를 구독했다.

그리고 그날 밤, 3시간 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해밀턴〉을 봤다.

그건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폭풍이었다.



3. 확신의 얼굴들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 불확실하다.

“불안정, 예측 불가능, 실패할지도 모름.”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감정들이다.


그래서 확신은 낯설다.

오히려 위험해 보인다.

“쟤 왜 저렇게 확신에 차 있지?”

세상은 확신보다 조심스러움을 칭찬한다.


하지만 뮤지컬은 다르다.

무대 위의 주인공은 늘 확신한다.

그게 사랑이든, 혁명이든, 자기 신념이든.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믿는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로버트 킨케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예요.”


그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확신’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낯설고,

동시에 얼마나 간절한 감정인지 깨달았다.


〈해밀턴〉의 주인공, 알렉산더 해밀턴 역시 그랬다.

고아, 사생아, 이민자.

모든 불리함을 끌어안고

“나는 나의 글로 역사를 바꿀 것이다”라 외친다.

그의 확신은 어딘가 무모하지만,

그 무모함이 곧 인간의 원동력이다.



4. “In New York, you can be a new man.”


무대 위 배우들이 이 대사를 외칠 때,

나는 몸이 떨렸다.

조명은 번쩍였고,

수십 명의 배우가 동시에 외쳤다.


“In New York, you can be a new man!”


그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나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그들이 목청껏 부르며 팔을 들어올리는 순간,

객석의 공기도 바뀌었다.

누구나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현실의 불안을 잠시 잊고 싶을 때마다

해밀턴의 넘버를 틀었다.

‘My Shot’을 들으면 근자감이 솟고,

‘Wait for It’을 들으면 버티는 법을 배웠다.

뮤지컬 넘버는 나에게 잠시 확신의 연료를 주었다.



5. 포항공대 도서관에서의 운명적 발견


그렇게 한참을 해밀턴에 빠져 살던 어느 날,

포항공대 도서관에서 친구가 무심코 외쳤다.


“야, 이거 네가 좋아하는 뮤지컬 제목 아니야?”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그 1428쪽짜리 벽돌책이었다.


나는 거의 달려가듯 그 책을 낚아챘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설렜다.

책값은 5만 원이 넘었고,

영문판이라 국내 서점에서는 보기 힘든 책이었다.

그런데 그게 도서관에 있었다.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날로 책을 빌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두 달 동안,

학교, 카페, 버스, 집—

어디서든 그 책을 품에 안고 다녔다.


압도적인 두께의 <알렉산더 해밀턴>




6. 넘버를 들으며 읽는 전기


처음 몇 장은 솔직히 지루했다.

‘재무장관’, ‘세입세출’, ‘조세정책’…

뮤지컬의 박진감은커녕,

수학 문제집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해밀턴의 넘버를 함께 들었다.

‘Alexander Hamilton’이 흘러나오면,

그의 어린 시절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Non-Stop’을 들을 땐,

책 속의 정치적 토론 장면이 살아났다.


그때부터였다.

활자가 무대처럼 보이기 시작한 건.

내 머릿속에서 조명이 켜지고,

배우들이 책 속 문장을 랩으로 쏟아냈다.

그건 독서가 아니라 공연이었다.


해밀턴만 보이면 사진 찍던 시절



7. 완독의 순간


마지막 장을 덮던 날,

나는 카페 구석에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1400쪽.

살면서 이만큼 긴 문장을 붙잡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 두꺼운 종이뭉치는

단순히 ‘책’이 아니라

내가 뮤지컬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증명하는 기록이었다.


그건 나에게 ‘덕질의 끝’이 아니라

‘사랑의 확장’이었다.



8.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뮤지컬을 사랑하면서 배운 게 있다.

사랑이란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도전할 용기를 준다.


내가 《Alexander Hamilton》을 완독한 건

공부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결과였다.

뮤지컬에 대한 사랑은,

내 안의 게으름을 이겨냈고,

지루함을 버티게 했으며,

한 사람의 생애를 끝까지 따라가게 했다.


확신은 언제나 위험하다.

하지만 그 위험 속에만

우리가 진짜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하철에서 해밀턴의 넘버를 듣는다.

“Just you wait…”

그 가사를 들을 때마다,

내 안의 불안이 잠시 멈춘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조용히 속삭인다.


“In Seoul, you can be a new man.”



에필로그 ― 뮤지컬이 내게 가르쳐준 것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건,

결국 삶을 조금 더 확신 있게 살아보겠다는 다짐이다.

무대 위 주인공처럼

넘버 한 줄에 온 감정을 쏟아내는 것,

그게 나의 인생 연습법이다.


그날의 책,

그날의 넘버,

그리고 그날의 확신.


그 세 가지가 겹쳐질 때,

나는 조금 더 살아 있는 나를 만난다.


이전 09화인생은 앙코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