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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Jun 30. 2019

미국 고등학생들에게 상담기술 가르치기

참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참 새로웠다.


이틀 전에 이 동네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또래상담 워크숍을 했다. 말하자면 고등학생들에게 또래 친구들을 대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간단한 상담 기술을 가르쳐주고 또 함께 연습했다. 십대 청소년들을 만나 무언가를 함께 한 건 참 오랜만이었고, 그 대상이 한국 청소년이 아닌 미국 청소년이었다는 점에서 처음이었다. 


이 워크숍은 이 곳 스테이트 칼리지 (State College) 교육부의 다양성/포용 부서 (Diversitiy & Inclusivity) 에서 올해 처음으로 시작하는 캠프의 일환이었다. 부서장 격인 채터스 박사님은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있는 학교의 풀타임 교수였는데 교육행정부서로 가고 싶다는 얘기를 몇 차례 하시더니 정말 훌러덩 가버렸다. 물론 여전히 우리 프로그램 내에서 이런저런 수업도 맡아주고 계신 정말 좋은 분. 프로그램 개발과 진행의 실무는 내 박사과정 동기 중 한 명인 디에나가 맡아서 해왔다. 그래서 디에나가 '또래상담 개론'에 해당하는 한 꼭지를 맡아줄 수 있겠냐고 지난 봄학기에 내게 부탁을 해왔던 것이었다. 또래집단이 주체가 되어 청소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건 내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모델인지라, 이런저런 불안감을 극복하고 흔쾌히 승낙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몇 번 후회하긴 했지만..).


5일 동안 다루어지는 캠프의 주요 주제들. 출처는 https://www.scasd.org/Page/36526






걱정 반 기대 반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적합할 수 있을까. 언제나 그렇듯 다급하게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하며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다. 걱정되는 지점은 내가 만날 이들이 '고등학생'들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초중생보다는 편안하게 느끼긴 하지만 여전히 십대 아닌가! 내가 조금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나는 십대라 하면 '반항'과 '방황'을 떠올린다. 꼭 외현화되지 않더라도 내적인 반항과 방황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도 비슷하겠지만 특히 미국 고등학생이면 이미 신체적 발달 상태는 성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괜히 조금 쫄아 있었다. 나중에 만나고 보니 다행히도 내가 지니고 있던 왜곡된 이미지에 부합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고딩들의 모습은 아녔다. 아무래도 다문화, 다양성, 포용, 그리고 또래상담에 관심이 있어서 온 친구들이기에 오히려 친근감이 들었다. 


이런저런 걱정을 했던 동시에 기대되는 부분도 컸다. 내가 오랫동안 관심 있던 주제였고 한국에서 그래도 제법 꾸준히 해 왔던 주제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청소년들에게 '인성교육' 또는 '나눔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캠프를 하고, 효과성을 측정하는 일에 참여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고등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상담의 기술을 가르쳐 보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기에 기대가 됐었다. 그러고 보면 상담기술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내겐 처음이었던 듯 싶다. 다음 가을학기부터는 석사생들에게 상담기술을 가르치는 수업을 코티칭으로 하게 될 텐데 이번 경험이 좋은 준비운동이 된 것 같다.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각각의 상담기술을 배우고 익힌 뒤에, 실제 교내의 클리닉에서 역할연습으로 실습을 했다. 아이들은 상담자, 내담자, 관찰자 역할에 각각 배정된다. 내담자 역할을 맡을 친구는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그 역할에 대해 10분 이내로 연기를 하게 된다. 상담자 역할을 맡은 학생은 이전 시간에 배운 기본상담기술을 토대로 상담을 하게 된다. 관찰자 역할을 하는 친구는 상담실 뒤편의 방으로 와 헤드폰을 끼고 창문을 통해 상담실을 관찰하고 상담내용을 경청한다. 이 창문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용의자들을 탐문하는 방처럼 생겨서 상담실에서는 관찰방을 볼 수 없고 오직 관찰하는 방에서만 상담실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역할연습을 마치면 피드백을 나누고, 역할을 바꾸어서 또 진행했다. 


대충 이렇게 밖에서 관찰이 가능하고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출처는 https://www.sjfc.edu/graduate-programs/






사실 아이들이 상담을 잘 해내면 다음 스텝이 참 쉬워진다. 나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은 모두 이렇게 기특한 아이들을 칭찬하고 격려할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조금만 잘해준다면 우린 그 틈을 파고들어 격려와 칭찬을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달까.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정말 잘해주었다. 그중에서도 특출났던 몇몇 학생들의 실력과 센스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 날 내가 알려준 기본 기술들을 곧잘 실천에 옮겼을 뿐 아니라 전혀 배운 적이 없었을테지만 훌륭하고 감각적인 질문들도 했다. 예를 들면 불안을 호소하는 상대방에게 "불안하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 불안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와 같은 정서를 구체화하는 질문을 한 친구도 있었다.


문제는 학생들이 상담을 잘하지 못했을 때다. 물론 상담을 잘 못하는 것 자체가 이 맥락에서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이 아이들은 고작 몇 시간 훈련을 받았을 뿐이기에 잘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잠깐의 연습 뒤에 너무나 잘해버리면 이 분야에 몸을 던진 내 신세가 오히려 처량해진다. 다만 잘해내지 못한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어떻게, 또 얼마만큼 줘야 하는지가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상담 분야에서는 상담자로서 나의 세션을 내보이고 슈퍼비전을 받는 것이 일상적이기 때문에 피드백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생산적으로 활용하는지의 역량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잠깐 트레이닝을 받는 고등학생 또래상담자들에게 너무 박하게 굴 수도, 또 잘못된 모든 내용을 따박따박 알려주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우려한 대로 한 학생이 배운 내용을 실천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지 좀 많이 서툰 모습을 보였다. 내담자 역할의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끼어들듯 질문을 하고, 그 질문마저도 탐색적인 열린 질문이 아니라 추궁하는 듯한 닫힌 질문, 그리고 어떠한 감정반영도 없이 조언을 계속해서 건네는 등. 아니나 다를까. 역할연습 이후에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에서 관찰자 역할을 한 학생이 몇 가지 개선점을 지적했고, 나 역시 전반적으로 격려와 칭찬을 하려고 애썼으나 한두 가지 아쉬웠던 부분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학생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이것 참.. 서툰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하며, 이 짧은 시간을 통해 효과적으로 피드백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이 모든 캠프를 조직하고 진행하는 채터스 박사님은 정말 잘 따라와 주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보며 적잖이 흥분하신 듯했다. 실은 나도 그랬다. 이 아이들이 이 캠프에서 배우고 성장한 바를 가지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보람찬 일이다. 올해 처음 시작하는 이 여름캠프는 이제 앞으로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여름마다 진행될 듯하다. 채터스 박사님이 "내년에도 같이 하자구!"라고 얘기해주셔서 "당연하죠!"라고 쿨거래했다. 무보수지만.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나는 실제로 이런 또래를 활용하는 프로그램이 학교폭력 및 여러 정신건강 문제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믿는다. 지난 몇 년 동안 학교폭력에 대한 연구를 해 오고 있는데 연구와 학교 장면에 대해 실제적인 고민들을 계속하다 보면 나의 결론은 늘 '그래서 어떻게 예방을 좀 할 수 있을까'로 수렴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폭력과 차별과 억압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믿진 않지만 줄일 수 있다고는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최근의 여러 연구들은 학교폭력을 당했을 때 또래 친구들이 위로해주거나 소위 폭력을 일삼는 일진들에게 함께 맞서 주면 폭력을 입은 학생이 정서적으로 큰 보호를 받게 됨을 보고하고 있다.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는 또래상담과 또래개입에 대한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믿고 있다.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을 필두로 다양한 또래상담 프로그램의 개발과 효과성 연구 등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권에서 개발된 프로그램과 수행된 연구가 의외로 많지 않은 데에 비해 국내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해나 가시는 선생님들이 꽤 계신 것 같다. 고무적인 일이다. 어쨌든 국내외 불문하고 같은 관심사를 지닌 선배 연구자, 실천가들과 함께 일해볼 기회가 앞으로도 종종 오면 좋겠다. 오려나? 오겠지? 왔으면!



덧. 워크숍 중에 어쩌다 보니 내가 한국에서 온 국제학생이란 점을 언급했던 거 같은데, 한 학생이 수업 중간에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를 좋아한다며 한국말로 내게 인사도 하고, 수업 내내 호응도 엄청 적극적으로 해주고, 다 마치고 나서 명함도 받아갔다. K-culture 종사자 분들께 압도적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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