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덩 Aug 13. 2020

결국 짐을 뺐다

내 삶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어제는 무척 오랜만에 학교 오피스를 찾았다. 3월에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학교가 전면적으로 닫은 이후에 약 다섯 달 만이었다. 그간 학교 캠퍼스에는 산책을 하러 몇 번 온 일이 있었지만 내가 주로 드나들던 건물과 오피스에 굳이 들어간 적은 없었다. 어제 방문한 까닭은 그간 사용하던 오피스의 내 책상을 정리하고 오피스 열쇠를 반납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5월, 학과로부터 제공 받던 재정적 지원이 끊길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는 아니었으면서도,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렇게 펀딩을 잃은 건 물론 나뿐만이 아녔다. 우리 전공의 많은 학생들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재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물건과 서류들을 정리하며 지난 3년 간의 박사 생활을 짧게나마 돌아보았다. 연구 회의록, 인쇄해 둔 논문들, 수업 자료들이 마치 내 마음처럼 어지럽게 책상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피스의 내 책상을 처음 배정받은 순간이 떠오르면서 그간 이 공간에서 함께 지냈던 동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머리를 스쳤다. 결국 그렇게 짐을 뺐다. 텅 빈 오피스 책상을 뒤로한 채 양 손에 한 가득 짐을 들고 오피스를 걸어 나오는 기분이 묘했다. 지난 3년 동안 이 오피스에서 참 잘 지냈다 싶기도 하고, 졸업할 때까진 당연히 이 곳에서 지내게 되리라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며 웃음도 나왔다. 영화에서 (특히 미국 영화) 간혹 주인공들이 한순간에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는 개인물품이 가득한 박스를 안고 길거리에 나와 황망한 표정을 짓곤 하던데, 지금 내 표정이 그럴까나 싶었다. 


내가 사용했던 오피스 자리. 책상은 텅 비었고 꽃잎은 유난히 파랗다.




미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는 호들갑이나 과민반응이 전혀 아닌, 지극히 실체적인 재앙이다. 이 글을 작성하는 2020년 8월 12일을 기준으로 확진자는 5백만 명을 훌쩍 넘겼고 사망자는 16만 5천여 명에 달한다. 연말까지 사망자가 30만 명에 달할 것이라 예측되고 있으며, 그럴 경우에 COVID-19 은 '심장질환'과 '암'을 뒤잇는 미국인의 사망원인 3위에 등극하게 된다고 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유가족으로 남겨진 상황에서, 고작 대학원생으로서 일자리를 잃은 걸로 상실감을 말하기란 참 부끄럽고 송구하다. 


그럼에도, 나 역시 지난 몇 달간 복합적인 불확실성의 한가운데서 살아오거나 또는 버텨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도교수님께서 최근에 한 두 군데 가능성 있는 일자리를 알아봐 주시긴 했지만 개강을 십여 일 앞둔 지금도 여전히 정해진 것은 없다. 트럼프 정부는 올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계속해서 유학생들의 신분과 지위를 위협하는 발언과 행정명령을 남발해오고 있다. 아이가 다니던 대학교 부설 어린이집은 아주 최근에서야 리오프닝을 결정했지만 아직 운영방침이 확고하지 않아서 당분간은 아이를 보내지 못할 듯하다. 가을학기부터 나는 취준생이 되어 잡마켓에 나가야 하는데 예년에 비해 채용공고가 얼마나 줄어들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런 나는 졸업 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마침내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찾는다면 그곳이 미국일지 한국일지 또는 제3의 장소일지, 알지 못한다. 




낮에 오피스에서 짐을 빼며 느낀 헛헛함 때문이었을까. 어젯밤엔 친구 몇에게 연락을 해 안부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의 통화에서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넌 뭔가 늘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랄까.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유유자적' 사는 느낌. 난 네 그런 모습이 좋아 보였어."

나는 답했다.

"얼추 그런 거 같아. 근데 조금 다르게 보면, 때로는 삶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무기력하게 '표류'하는 것 같기도 해."


삶이란 원래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가꾸어 나간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우리 모두는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어쩌면 개인의 선택보다도 우연히 주어지는 삶의 조건들이 우리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물론 나 역시도 주어진 상황과 여건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리고자 하지만, 사실 내 삶은 그저 수많은 우연의 집합물 (신앙 안에서는 종종 필연이 되는) 이라고 이해될 때가 더 많다. 그렇기에 내가 삶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란, 가능한 몸에 힘을 빼고 삶의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이 된다. 이런 자세에는 삶의 역경에 수용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해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때때로 세상에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을 때는 무기력함에 삶이 지배당하기도 쉽다. '유유자적'과 '표류'는 바로 그 한 끗 차이인 셈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바꾸어 놓은 지난 몇 달 간의 시간은 나에게 곧 무기력과의 싸움이었다. 삶의 물살이 나를 데리고 가는 곳은 어디일런지. 때로는 기대도 되고, 때로는 걱정도 된다. 그 물살이 생명력을 잃고 멈추는 마지막까지도 '무언가'가 되어버리지 않은 채로 남고 싶기도 하고, 이제는 그만 어떤 '무언가'가 되어버려서 매너리즘에 빠진 채로 무료함에 흠뻑 젖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최근 들어 지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표류하는 중이라 할지라도 결코 처량한 손짓 발짓을 멈출 수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저 한 사람이면 충분할 때도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