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상처, 내 마음에 오로 새겨진 그 상처의 기억이 불현듯 나를 찾아올 때가 있다. 그 방문은 종종 급작스럽다. 어느 때고 갑작스레 나를 찾아와 내 머릿속을 한동안 맴돌다 간다. 또 상처의 기억은 종종 시간을 초월한다. 그 사람의 모진 말이 지금 바로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고, 그때의 그 싸늘한 공기가 지금 여기서 내 볼을 스치는 듯하다.
어떤 상처들은 나의 기억을 먹으며 자라난다. 내가 기억해내고 곱씹는 만큼, 지금 와서 내가 느끼는 상처의 크기도 커지는 것이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원래 상처의 크기가 어떠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때로는 상처가 뭐였는지조차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비난의 화살촉이 스스로를 향하게 될 때가 그렇다. 난 대체 왜 이런 걸까. 왜 나만 멘탈이 약한 걸까. 난 왜 이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난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걸까. 도대체 왜, 난. 이런 과정은 결국 한 두 가지의 강렬하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 일이, 그 사람이 내 모든 걸 망쳤어." "그때 제대로 대응도 못한 나는 진짜 X신이야." "내 삶은 엉망진창이고 회복될 수 없어."
우리가 이런 생각에 종종 사로잡혀 있을 때에도,
정말 상처의 회복과 치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탈중심화, 마음의 유체이탈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인지행동치료의 기법 중에 "탈중심화"라는 개념이 있다. 탈중심화란 개인이 자신의 즉각적인 경험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스스로의 경험을 관망함으로써 그 경험 자체의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난 즉각적으로 '뭐 정신적으로 유체이탈을 하는 그런 느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경험을 몇 발치 뒤에서 바라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탈중심화라는 말이 중심화에서 벗어난다는 뜻임을 생각해 볼 때, 탈중심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심화"가 무엇인지 먼저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중심화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상처로 남은 그 기억에 대하여 어떤 특정한 한두 가지에 매몰되어 다른 모든 중요한 것들은 고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내게 한 어떤 말 하나, 행동 한 가지에 생각이 꽂혀서 나의 모든 반응이 그 말이나 행동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중심화된 사고는 내가 경험한 상황에서 제한적인 부분에만 선택적인 주의를 지속하게 되기 때문에, 지속될수록 쉽사리 비합리적인 결론에 빠지기 쉽다.
반면 탈중심화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편향된 중심화된 사고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자신이 경험을 한 발 물러나 찬찬히 살펴보는 과정이다. 달리 말하면, 나의 일임에도 제 3자의 입장을 취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내게 일어났던 상황이 사실은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어떻게 느껴질까. 또 나는 거기에 어떻게 반응을 할까.
아무래도 좀 더 심드렁한 탓에 감정적 소모가 훨씬 덜할 테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진단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탈중심화는 하나의 능력이며 건강한 심리적 발달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얘기하고 있다. 내가 겪은 상처와 그에 대해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평가하고, 스스로의 반응이 과하다면 그 반응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마음의 유체이탈이 일어나는 과정
마음의 유체이탈, 탈중심화는 최근 10여 년 간 많은 학자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아 왔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이 탈중심화야말로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회복하여 개인의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라고 얘기했다. 이러한 탈중심화, 즉 마음의 유체이탈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심리적 거리두기"이다. 거리두기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종착지는 "자기 객관화"라고 할 수 있다. 거리를 두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첫 번째 요소는 내가 나의 경험에 대해, 상처에 대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상처가 찾아올 때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과 느낌을 반복적으로 확인해야만 그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거리두기를 위한 두 번째 요소는 내가 알아차린 것들을 "받아들이기"다.
심리적 거리두기에서 중요한 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로부터 도망치려 하거나 맞서 싸워 부숴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껏 해왔던 그런 노력들을 포기하면서 슬쩍 유체이탈 화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얘 또 그때 생각나서 엄청 우울하구나. 그것 때문에 또 자기가 아주 세상 바보 같다고 생각을 하네." 마치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이렇게 거리를 둠으로서 상처의 경험을 부정하지도 않고 반박하지도 않으며 그 생각에 갇히지도 않는다.
첫 번째 요소가 몇 차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두 번째는 저절로 찾아오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바로 "반응이 줄어드는" 것이다. 즉, 상처와 연관된 경험을 떠올려도 나의 반응이 전과 같지 않아 지는 것이다. 이전에는 정말 죽도록 싫고 끔찍했던,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기억이었지만 이젠 그 정도는 아니다. 물론 그 기억은 지금도 정말 싫고 딱히 떠올리고 싶지는 않은 여전히 불쾌한 기억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별을 통보한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때문에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우울감에 늘상 빠지는 정도는 아니고, 내 가슴에 상처를 남긴 엄마의 말 한마디 때문에 엄마 얼굴을 보기만 해도 화가 치솟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유체이탈이 일어나는 마지막 과정, 그 세 번째는 "기억의 재구성"이다. 기억의 재구성은 빅 픽처, 즉 큰 그림을 그리게 되며 일어난다. 상처가 되는 사람 또는 사건에 대해 내 생각과 감정이 함몰된 상태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게 되면서 보다 다양하고 넓은 관점에서 내 경험을 해석하고 반응하게 된다. 보이지 않던, 보지 못하던 것들을 차차 보게 되는 것이다. 끔찍함으로만 남아있는 옛 인연과의 기억에서도 즐겁고 좋았던 시간들도 함께 생각해보게 되고, 부모가 내게 준 그 상처만을 곱씹느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많은 감사한 경험들을 참작하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관점에서 재구성된 기억은, 앞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마음의 양분이 된다.
나에게 좀 더 자상한 내가 되기
물론 이 과정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이처럼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게 일어난다면 그 누구도 과거의 상처로 인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고통에 시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상처와 그 기억으로 인해 발가벗겨진 것만 같을 때, 그 때문에 내가 원하던 삶을 지금 살고 있지 못하다고 느껴질 때, 누구라도 붙잡고 짜증과 원망을 쏟아낼 준비가 됐다고 느껴질 때, 눈을 감고 머리 위로 몸을 두둥실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그리곤 위에서 나를 잠시 바라봐 준다. "응, 또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잠깐 바라보다 보면 바보 같은 모습 너머로 딱하고 안쓰러운 모습이 보인다. "그래, 그건 좀 힘들만한 일이었지." 평소 스스로에겐 하지 못할 말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나의 상처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보일법한 상투적인, 그럼에도 여전히 진심 어린 반응을 잠깐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비난 대신 연민과, 공감과, 자애로움을 쌓아나갈 때 우리는 상처에서 회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