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기질의 아이
하나하나의 아이들은 고유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기질, 성격, 애착, 행동양식 등에 따라 아이들을 분류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Thomas 와 Chess의 기질 이론에 따르면 아이들은 크게 세 가지 기질로 구분된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기질은 "쉬운 (easy)" 기질, "느린 (slow-to-warm)" 기질, 그리고 "까다로운 (difficult)" 기질이다.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는 정해진 일과에 따르는 걸 어려워하고, 식습관이나 수면습관도 불규칙한 경우가 많다. 사소한 일에도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그 기준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무척 힘들어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까탈스러운' 성격을 가진 걸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양육자로서는 까다로운 기질을 가진 아이의 요구 (demand) 와 욕구 (need) 를 만족시켜주기가 어렵고, 아이는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부정적인 감정을 격하게 표현하곤 한다.
얼마 전부터 유치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홈스쿨링을 시작한 첫째는 누구보다도 이런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였다. 요구사항도 정말 많았는데, 식사를 한 번 해도 그릇 종류며 반찬을 놓는 위치와 모양까지, 그런 사소한 것에까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있었고 그런 작고 세세한 요구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많이 힘들어하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일상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아이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와 '한계를 설정해주기' 사이에서 어디가 가장 적절한 지점인지를 찾아 헤매야 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많이 차분해지고 수월해지긴 했지만 아이는 최근까지도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가 보이는 특성들을 많이 보여 왔다.
아이는 무척 편안해한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은지는 이제 고작 보름여 시간이 되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몇 가지 변화들이 눈에 띈다. 집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이 스스로가 편안하게 지내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말을 잘 따라주고 이전에 비해 고집을 덜 부리는 것 같다. 한계를 설정해 주면 (예: 잘 시간이 됐는데 공주놀이를 하겠다는 아이에게 "이젠 잘 시간이 되었으니 아쉽지만 오늘은 어려워. 내일 꼭 하자") 조금은 실망한 표정으로 "네, 알겠어요." 라고 받아들이는 일이 훨씬 많이 늘어났다. 항상 같이 놀자고 손을 끌어당기던 아이였는데 혼자 즐겁게 노는 시간이 좀 늘어난 것도 같다.
저명한 심리학자 Baumeister 는 의지력에 대한 그의 이론을 통해 "의지력이란 한정된 자원이어서 많이 사용하면 점점 고갈되고 나중에는 의지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진다"는 주장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 냈다. 미국의 유치원은 전반적으로 한국보다도 꽤나 엄격한 면이 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얌전하게 자리에 앉아 다 같이 식사나 간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놀라곤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에서는 도통 보기 어려운 모습들로 단체생활을 잘 해내기 때문이다. 단체생활이 요구되는 유치원에서 아이는 자신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다 표현하지도, 그런 욕구들을 모두 충족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로서는 규칙에 따르고 통제에 응하기 위해서 의지력을 발휘했어야 할 상황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건 참아야 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는 많은 순간들. 아이는 그동안 그렇게 학교에서 모든 의지력을 고갈시키곤 집에 와서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며 힘든 마음을 표현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랬던 아이가 이젠 학교를 가지 않게 되면서 이제는 의지력이 남아 돌기라도 하는 걸까. 아이의 "네, 알겠어요"라는 답이 낯설면서도 반갑다.
아이는 심심해한다, 하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는, 편안해 보이지만 심심하고 친구들과도 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학교에 가는 것보단 여전히 집에 있는 게 훨씬 좋은 눈치다. 심심해하는 아이를 위해, 그리고 갑작스레 풀려버린 날씨 덕에 지난 주말엔 오랜만에 놀이터로 향했다. 아이는 놀이터로 출발하기 전부터 "혹시 우리 놀이터에 같이 놀러 갈 만한 친구가 있을까?"라며 친구를 찾았다. 우리 가정은 지금 지내는 곳에 이사 온 지도 얼마 안 됐을뿐더러 요샌 그나마 알던 지인들도 코로나바이러스에 많이들 걸려서 연락을 할만한 가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갑작스레 친구를 부르긴 어렵겠다는 내 대답을 듣곤 아이는 수긍하면서 놀이터에 가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좋은 날씨 덕이었는지 놀이터에는 다른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학교에서 인간관계에 좀 치여서일까, 아이는 원래 낯도 좀 가리고, 수줍어하기도 하는 탓에, 놀이터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랬던 아이가 오늘은 먼저 달려가 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이 서로 친구가 되는 걸 지켜보면 참 신기하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소개와 인사를 거치면 아이들은 친구가 된다.
"안녕!"
"안녕? 너 몇 살이야?"
"나 4살이고 PRE-K 에 있어."
"난 6살이야. 내 이름은 캐씨야. 여기는 내 동생이고, 너랑 나이가 같아. 4살이거든"
"나는 쏘피야."
"우리 모래놀이할래?"
"그래 좋아! 나 모래놀이 좋아해."
그렇게 곧장 놀기 시작한 아이는 갑자기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아빠, 나 친구 두 명이나 생겼어!" 라며 자랑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처음 만난 아이들은 한참을 함께 뛰고, 미끄럼틀을 타고, 모래놀이를 했다. 그렇게 놀고 난 후 아이는 친구와 놀고 싶었던 약간의 허기짐을 좀 채운 듯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필요한 게 뭔지, 하지 않도록 금해야 할게 뭘지 늘 생각하고 또 고민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잠깐, 그런데 정말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게 맞나? 아이의 필요와 욕구를 매번 찬찬히 읽으려 하기보다는 순식간에 판단을 내려버리거나, 아니면 과거의 판단에 의존하여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기계적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아이 스스로라는 생각을 한다. 머리로 아는 것은 아닐지라도 아이는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또는 없어도 괜찮은 게 뭔지 끊임없이 표현한다. 물론 말로 표현할 때도 있지만 언어적 표현이 아닐 때도 많다. 그런 필요와 욕구가 좌절된 아이는 때로는 떼를 쓰고, 소리를 지르고, 뭔가를 던지기도 한다. 더 심하게는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자신을 때리기도 할 테다. 또 어떤 아이들은 겉으로 그렇게 나타내는 대신 좌절을 속으로 내면화한다. 말수를 줄이고, 마음속으로 자책을 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진부한 이야기지만서도, 부모로서는 아이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경청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다. 모든 요구사항을 다 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언급한 것처럼 '아이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와 '한계를 설정해주기'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유치원을 가지 않게 된 이후 달라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느낀다. 아이는 부모가 적절한 테두리를 정해주기만 하면 그 안에서 스스로 자신이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먼저 나서서 찾아나간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