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절 선생이 짜놓은 시간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원회운세는 주로 역학(易學)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자생한 전통종교에서 활용하는 시간에 관한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소강절 선생이 황극경세서에서 밝힌 시간의 구도대로 지구가 순환할까요?
12는 12지지(地支)가 의미하는 시간이고, 30은 1월을 30일로 보고 계산한 것이죠. 시간은 지금처럼 24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12단위, 즉 12지지로 나눈 것입니다. 그래서 60분도 절반인 30분으로 계산이 된 것이죠. 2분을 1분으로 본 것이니 30분은 지금의 60분과 같은 겁니다.
역으로 추산해서 올라가면 시간은 자연스럽게 「시-일-월-년-세-운-회-원」으로 크기가 확장됩니다. 그래서 지구 1년(연월일시)은 우주 1원(원회운세)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같은 논리로 추산하면 1시(時) 아래로는 무한소, 1원(元) 위로 확대하면 시간은 무한대로 확장이 되겠죠.
지구는 북극성을 축으로 해서 자전하며 태양을 공전합니다. 자전으로 인하여 1일이 밤과 낮으로 구분되고, 공전으로 인하여 1년이 춘하추동 4계절로 구분됩니다.
직립보행을 하며 두뇌를 활용하는 인간은 지구의 1년이 만들어내는 밤과 낮, 그리고 춘하추동을 경험하며 생장성쇠(生長盛衰)의 이치를 깨닫고, 생로병사를 경험하며 생장수장의 이치를 순환합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또 1년을 반복하며 이어질수록 반복되는 삶 속에서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영원한 삶을 꿈꾸게 되죠. 그리고 100여 년 동안 춘하추동을 100번 가까이 반복 경험하며 또 다른 100번의 순환을 꿈꾸게 됩니다. 한정된 시간의 단위 속에 살면서 반복되는 춘하추동 사계절을 통하여 깨달은 생장수장의 이치를 더 큰 단위의 시간 속에서 체현하고자 하는 것이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내가 죽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미래는, 그래서 종교적 영역을 통하여 경험을 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조건 없는 믿음이 아니라 나름의 이치와 논리를 통해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대개 지구상에서 생로병사라는 경험을 통해 누적된 생장수장(生長收藏)이라는 인문적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죠. 생장수장이란 땅에 저장된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꽃과 열매를 맺은 후, 다시 땅에 떨어진 열매를 삭힌 뒤 알갱이를 선별, 수렴하고 땅에 저장하였다가 다시 봄이 되어 싹을 틔우는 반복적 순환 논리를 의미합니다. 대부분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논리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시작이 되죠.
그런데 지구의 사시순환, 생명의 생장성쇠(生長盛衰), 생로병사(生老病死), 그리고 생장수장(生長收藏)이라는 지구상의 이치가 더 큰 시간 단위의 우주 순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짜놓은 시간의 틀로 우주의 시간을 규정하면 우주는 인간의 시간대로 따라 움직일까요?
지구의 1년을 추론하여 우주의 1년을 논리적으로 확장, 129,600년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종교의 주장처럼 춘하추동이 만들어내는 생장성쇠의 이치가 지구의 1년처럼 129,600년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그대로 반복 재현할까요?
물론 「부분과 전체」라는 양자 물리학적 프랙털 구조의 논리를 들이댈 수는 있겠지만 그건 논리의 비약이 너무 크죠. 프랙털이란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부분 속에 전체의 모습이 있다는 그런 원리를 말합니다. 전체 속에 부분이,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있다는 「一中多 多中一」의 논리입니다.
어쨌든 인간이 설정한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흐르는 건지 멈춰서 있는 건지, 아니면 시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조차 아직 정리되지도 않았거든요. 시간이라는 것을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논리정연하게 추론하여 정렬시켜놓았다고 해서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겠죠.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1년, 약 365일이 걸립니다. 129,600년은 단순히 연월일시라는 시간의 논리적 확장일까요? 같은 논리로 좀더 확장하면 무한대로 원회운세가 연월일시를 확장하듯 더 넓혀질 수도 있습니다.
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약3만광년 떨어진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태양을 포함한 태양계는 은하계 중심을 축으로 공전한다고 합니다. 태양계가 은하 중심의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는 약 2억 2천5백만~2억 5천만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어쨌든 태양이 은하의 중심을 도는 시간은 우주의 1년이라고 하는 129,600년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지구가 속한 우주의 시간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미시(未時)에 해당하는 시간대일까요? 그래서 땅에 떨어진 열매를 숙성시켜 알갱이를 추리듯 알갱이 인간을 추려내는 그런 시간대를 지나고 있는 걸까요? 각종 종교들이 예견하듯 우주의 주인인 인간 중에서 참된 알갱이를 추려 상생의 시기인 후천 가을 시대로 넘기는 작업이 진행 중일까요? 추수 꾼이 와서 쭉정이를 버리고 알갱이를 고르는 작업을 하고 있을까요?
그런데 자연이란 것이 도대체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아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거나 가리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태풍은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쓸어버리죠. 비는 누구에게나 그냥 내립니다. 가난하지만 선량한 길거리 종이장수에게도요. 순자(荀子)는 ‘하늘은 인정이 없어서 인간을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취급한다’라고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들이 서남방에 위치한 곤토(坤土)의 성정처럼 열매를 받아드려 삭힘으로써 알갱이만을 선별하는 군자들의 출현을 기다리나 봅니다. 그런데 자연의 성정에는 알갱이만을 우선 대우해주는 그런 자비로움은 없거든요.
여름에서 가을로 전환하는 시기, 곡식을 추수하는 계절로 비유하여 말세 또는 개벽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 그리고 증산도 계열의 종교가 있습니다. 결코, 종교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문적 접근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논해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 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종교의 성립과정이나 목적,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경험에서 나오는 생에 대한 애착, 우리가 매 순간 춘하추동을 따라 경험하는 생장성쇠와 생장수장의 이치 등등을 생각하면 그 비유들은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아 보입니다.
여름의 한순간을 살다가는 하루살이 모기가 하루살이의 시간 개념을 추론해서 지구의 1년, 또는 100년의 지구를 추정한다고 가정해 보죠.
봄의 하루와 여름의 하루, 가을의 하루, 겨울의 하루를 사는 생명체는 각각 지구의 1년을 어떤 모습으로 추론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하루와 그다음 날 하루의 모습은 전혀 다른데, 그리고 그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의 생태학적 삶도 전혀 다른데, 비가 오고 태풍이 부는 날 태어났다가 한순간을 경험하고 죽은 하루살이 모기와 뜨거운 어느 여름날에 태어나 하루를 살다 간 하루살이 모기가 바라보는 지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 인간은 영겁 같은 시간대의 어느 일순간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우주의 봄인지 여름인지 또는 가을, 겨울인지도 모르는 채 일순(一瞬)도 되지 않는 찰나에 거주하는 인간이 영겁(永劫) 같은 우주를 판단하고 규정하고 그것을 믿고 운명을 예측한다는 게 때로는 당황스럽습니다.
기껏해야 100년을 채 살지 못하는 우주의 변방, 방안의 먼지보다도 더 작은 먼지의 먼지 같은 지구에 얹혀사는 인간이 건방지게 영겁의 우주를 규정하고 판단합니다. 감히 하루살이가 지구의 1년, 지구의 100년을 예측하듯이.
지구의 시시순환으로 판단할 수 있는 변혁의 형태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종시(終始)를 쥐고 있다는 간토(艮土☶)의 작용과 교역(交易)의 역할을 하는 곤토(坤土☷)의 작용이죠. 간토는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환절기이고, 곤토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해당하는 시간대입니다. 간토는 땅속에 저장되어 겨울☵을 견디고 있는 씨앗을 깨워 봄☳에 싹을 틔우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곤토☷는 양기를 모은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이것을 삭혀 알갱이(씨앗☲)만을 선별하여 가을☱ 금기에 수렴하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문왕팔괘도의 동북방에 위치한 간토☶는 씨앗을 저장하고 있는 감수☵를 터치(극)함으로써 생기를 깨우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진목☳이 간토☶를 극함으로써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게 되죠. 오행의 생극 원리로 보면 「木克土-土克水」의 논리가 성립됩니다. 즉, 극함으로써 생명을 얻고 자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봄·여름으로 상징되는 선천세상은 상극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陽)인 진목☳이 양(陽)인 간토☶를 극하고, 간토는 양(陽)인 감수☵를 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천세상은 양(陽)이 주도하는 상극의 원리가 지배하는 건도(乾道)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음이 주관하는 가을과 겨울의 곤도(坤道) 세상을 종결시키고(終), 양이 주관하는 봄과 여름을 시작하게 하는 힘(始), 그것이 바로 간토의 종시(終始) 역할입니다.
곤토☷의 금화교역(중재)
문왕팔괘도의 서남방에 위치한 곤토☷는 뜨거운 양기를 가득 담은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다려 삭힘으로써 알갱이와 쭉정이를 선별하여 알갱이만을 가을 태금☱에게로 넘겨주는 교역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열매를 상징하는 뜨거운 여름의 이화☲를 받아드려 서늘한 가을 금기☱로 넘겨주는 것이죠, 여름의 화기☲와 가을의 금기☱는 화극금(火克金)으로 서로 충돌하는 기운이므로 금화상쟁(金火相爭)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중간에 곤토☷가 화와 금의 싸움에 끼어들어 화해시키는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죠. 이를 금화교역(金火交易)이라고 합니다. 즉 화극금(火克金)을 토가 중재함으로써 「火生土-土生金」이라는 상생의 기운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을·겨울로 상징되는 후천 세상은 상생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음기인 이화☲가 음기인 곤토☷를 생하고 곤토는 음기인 태금☱을 생하고 있죠. 그래서 후천 세상은 음이 주도하는 상생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간토☶는 축시(丑時), 곤토☷는 미시(未時)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축시인가,
아니면 미시인가?
대부분 종교들은 지금이 미시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지금이 미시라고 생각할까?
인간의 시간, 인간이 살아온 지금까지의 시간은 찰라도 되지 않는데, 우주가 빅뱅으로 생겨난 시점을 137억 년으로 보면, 인간이 원숭이 적부터 계산해 본다 해도 수백만 년 정도도 되지 않았는데,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시간에 불과한데, 인간의 시간을 적용해서 지금이 벌써 미시라고 판단하는 거지?
물론 반복되는 129,600년의 시간대 중에 미시라고 보는 것이겠지만, 영겁의 시간으로 볼 때 129,600년은 찰나의 찰나의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라는 거지. 아, 혹시 인간이 마치 무한대를 사는 주인공이라 착각하고, 시간의 무한 반복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방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물론 지구가 사시순환을 1년의 과정을 통해 순환할 때 그 안에 사는 만물이 생로병사를 반복하듯, 지구도 129,600년을 단위로 사시의 변화를 겪는다는 것은 또다른 종교적 신념이지만.)
어째든 이건 인간의 관점이고, 인간이 송충이를 미물로 취급하듯, 인간을 미물로 취급하는 고등동물이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지금이 축시에 해당한다고 할지도 모르지.
인간의 역사는 원숭이부터 계산해도 이제 겨우 수백만 년, 아니면 1~2만 년?
이건 시간의 축에도 끼지 못하지, 지구가 생겨난 지 45억 년인데,
지구가 1년을 순환하고 인간이 그 속에서 춘하추동을 경험하듯이, 129,600년은 7~80년에 불과한 인간이 시간을 더 연장, 형이하학적 죽음을 넘어서서 형이상학적 생명을 가지고 더 큰 범위의 춘하추동을 경험하고 싶은 시간대라고도 할 수 있지.
129,600년이라는 우주 1원(元)은 결국 지구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삶을 더 연장하고 싶은 인간의 시각에서 지구의 1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확장해낸 시간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지. 지구의 춘하추동을 논리적으로 확장하여 더 넓은 우주의 춘하추동으로 넓히고 싶은 거야.
종말론, 개벽론은 모두 미시(未時☷)의 시간대를 활용하기가 딱 좋아, 이 험난한 세상을 상극으로 규정하면, 새로운 상생(相生)의 세상이 도래하는 시간대라고 홍보하기가 얼마나 좋아, 하늘에 호화로운 특급관광호텔을 홀로그램으로 지어놓고 떼돈 벌기 딱 좋은 시기지.
그런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지구에 해로운 인간 바이러스를 제거하고 지구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축시(丑時☶)인지도 몰라.
지구의 축은 북극성을 축으로 자전하며 태양을 공전합니다. 공전 면에 대해 23.7도 기울어져 있는데 고정된 것은 아니고 몇만 년에 걸쳐 극미세하게 변한다고 하죠. 그러니 후천 세상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지축이 바로 선다고 하는 과학적인 가정도 사실은 망상은 아닌 것이죠. 어느 정도 과학이라는 근거를 받침으로 활용해야 모든 게 그럴 듯해 보입니다.
북극성의 미세한 변화, 태양의 미세한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에 따라 지구의 축은 흔들릴 수 있겠죠. 이건 과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인간의 시간으로 측정하고 특정한다고 해서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종교적 교리와 믿음과는 관련이 없다는 거죠. 오히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놓은 온실효과가 더 큰 문제입니다.
금성의 시간은 공전 주기로 인하여 지구의 시간에 비해 매우 짧습니다. 공전 주기가 지구보다 긴 화성의 시간은 지구의 시간보다 길고요. 지구의 시간과 단위가 같다고 하더라도 단위의 길이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사는 생명체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간은 개념이 서로 다를 수밖에요. 인간의 시각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우주를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죠. 저는 과학자가 아닌 인문학도이니, 제 설명이 완전히 과학적이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원회운세(元會運世)의 개념에 대한 정서적 의미 부여를 배제하고 바라본다면, 세(世)는 지구가 태양을 30번을 도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운(運)은 360회, 회(會)는 10,800회, 원(元)은 129,600회를 공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구의 춘하추동이 만들어내는 연월일시라는 시간의 의미, 생장수장의 이치를 더 넓게 확장하여 원회운세에도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원회운세는 우주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지구 시간의 확장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인간의 존재를 더 확장하기 위하여 지구의 시간을 우주로 확장해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공간적으로 달을 정복하고, 화성에 정착촌을 계획하며 더 넓은 공간으로 인간의 영역을 더 개척해 나가듯, 시간의 영역도 더 넓혀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런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주지하다시피 우주에는 지구보다 더 크고 더 멋진 별들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도록 널려 있습니다. 별들마다 각자 시간의 개념이 다르고, 공간적 개념이 다르고, 춘하추동의 개념이 다르고, 생장수장의 이치가 다른데 유독 지구의 개념으로 우주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불성설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구의 하나님이 전 우주를 창조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면 가능한 일일 수도 있구요.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보는 우주는 너무나 신비하고 황홀합니다. 종교적 도그마로 개념을 규정하고 고정시키기에는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죠. 그래서 우주는 더 아름다운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사시 순환에 따라 생장성쇠(生長盛衰)하는 만물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이치를 경험하면서 지혜를 쌓은 인간은 생장수장(生長收藏)이라는 고상한 철학을 깨닫게 됩니다. 다년생 동식물은 정확하게 지구의 춘하추동 사시순환을 따라 생로병사를 경험하고, 생장수장의 이치를 실현합니다. 이러한 지구의 1년 춘하추동을 따라 발생하는 생장수장의 이치를 우주적으로 확장하면 우주의 생장수장의 이치가 논리성을 장착하게 됩니다. 생로병사의 순환 속에서 씨앗을 남겨 다시 생로병사를 반복하는 생명의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생장수장이라는 더 큰 이치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죠.
개벽은 지구가 개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지구의 변화에 따라 생멸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형이하학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종교적인 틀을 통해 찾아낸 논리의 개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구는 우주라는 틀 안에서 순리대로 변화하며 흐르고 있는 것뿐인데. 그 안에 사는 생명체는 이러한 작디작은 변화를 개벽이라 호들갑 떨고 있는 것입니다.
집안에 떠도는 먼지보다도 더 작은 먼지 같은 먼지에 얹혀살고 있는 미생물이 자신의 시각과 자신의 시간으로 집이라는 우주의 생멸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당돌한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멋지기도 하고요.
인간은 지구의 사시순환을 대략 70~100번 정도 반복하며 순환하다 죽게 됩니다. 거북이는 100년 이상을 산다고 하죠. 어떤 대양 백합 조개는 500년 정도의 생존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바닷속 유리스펀지라는 무척추동물은 15,000년 정도의 수명을 가지고 있고, 불사해파리는 이름처럼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돌발상황에서 성숙한 몸을 다시 미성숙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고 하니 완전 회춘 능력이 대박입니다. 그에 비해 인간의 시간은 참으로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하루살이 모기가 바라보는 하루는 100년을 사는 인간이 바라보는 하루와는 많은 차이가 있겠죠.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 알까지 낳아야 하니까요. 하루살이 모기의 그 하루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비록 24시간에 불과하지만, 모기에게는 우리 인간의 100년과도 같은 긴 시간대일 겁니다.
우주의 주인이 인간인가요?
인간의 시각, 인간의 시간이라는 시공간적 굴레에서 벗어나야만이 객관적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주는 내 생각, 나의 판단, 나의 결정을 고려하지 않고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