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초기 설정이 그렇게 중요하다.
3년 전 차를 살 때였다. 차를 건네받는 날 영업사원으로부터 몇 가지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 버튼은 어떤 거고, 저거는 어떤 거니 필요할 때 새로 세팅해서 사용하면 된다 등의 설명이었는데, 오디오 부분에서 "잠시만요"라고 외쳤다. 그리곤 물었다. "그거 세팅값 지금 바꾸려고 하는데 지금 좀 도와주세요". 난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설명이 내 한 귀에 들어갔다 그대로 반대쪽 귀로 나가리란 걸. 그래서 지금 안 바꾸면 이 차 폐차할 때까지 평생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딱 귀에 좋도록 값을 선택해서 곧바로 기본값을 변경시켜 버렸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 사실 고백하자면 지금은 어떻게 바꾸는지 조차 모른다.
한번 정하면 바꾸기는 참 어렵다. 달려가는 차를 세우기도 어렵고, 이사할 때 배치된 가구는 웬만하면 그대로 있다. 스마트폰 사며 기본 탑재된 앱은 지우기도 어렵지만 웬만하면 그대로 둔다. 한번 네이버를 쓰면 플랫폼이 바뀌어도 네이버를 쓰고, 평소에 먹던걸 웬만하면 계속 먹는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새로운 뭔가를 한다는 건 너무너무 어렵다. 아니, 그렇게 살면 힘들어서 못 산다.
'해빗: 내 안의 충동을 이겨내는 습관 설계의 법칙'의 저자 웬디 우드는 말한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란 참 힘든 일이라고.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는 건 사실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대신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자제하거나 인내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그 습관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점으로 꼽은 1단계가 '늘 동일하게 유지되는 안정적인 상황을 조성'하라는 거다.
영국의 AADC (Age Appropriagte Design Code)라는 제도가 있다. 온라인상에서 청소년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것인데 지킬게 꽤 많아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의무사항이 단 한 가지다. 기본적으로 18세 이하라고 확인되면 회사가 제공하는 몇몇 서비스의 기본값을 'off' 즉, 꺼야 한다는 거다. 채팅 기능도, 친구 추천도, 맞춤형 상품 제안도, 스마트폰에 뜨는 앱의 알람 기능도, 광고를 위해 쿠키를 수집하는 것 등도 모두 기본적으로 꺼놔야 한다. 그럼 이 기능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해당 계정을 Parental Controls (i.e. 자녀 지킴이)과 연동해 부모 등이 바꿔줘야 사용이 가능하다. '늘 동일하게 유지되는 안정적인 상황'인 기본값을 이렇게 off 시켜 놓음으로써 뭔가를 바꾸려면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뭐, 여기에도 분명히 맹점이 있을 거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을 테니깐. 하지만 이 정도면 그냥 끄덕여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이 정도까지다. 즐겁고도 명랑한 온라인 일상을 위해 나머지는 각 부모-자녀 간에 알아서 잘하셔라.
다른 나라가 꼭 잘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걸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얘네들은 시스템을 어떻게 구성해야 적절한 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다고. '관성'이라는 힘을 이용해서 기본값을 구성한 후, 그것을 멈추려면 적절한 '에너지'를 넣어야 한다. 빅브라더에게 모든 걸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도 아닌 뭔가 적절한 균형이랄까. 뭐,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