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이 그리는 잔인한 여인의 초상
<블루 재스민>(우디 앨런, 2013)은 보기 힘든 영화였다.
일단은 여주인공 재스민(케이트 블란챗)이 문제였다. 대개의 영화는 관객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그리고 그가 목표를 성취하기를 바란다. 응원하고, 같이 기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재스민은 감정이입이 되다가도 결국에는 응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뉴욕의 초상류층이었던 재스민. 남편이 희대의 사기꾼으로 밝혀지고 감옥에 가면서 빈털터리가 된 채,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동생 진저네 집으로 와 눌러앉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재스민은 진저와 진저의 집, 진저의 남자친구, 아니 그곳의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아직도 초상류층 시절을 잊지 못하는 재스민과 노동계급인 진저와 친구들, 그리고 그녀가 사는 동네와의 불화를 다룬다. 영화 속 재스민 주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객들 또한 여전히 주제파악이 되지 않는 재스민을 보면서 한숨을 쉴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재스민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이의 공적이 된 자신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원래부터 그렇게 살았고, 여전히 그런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사고범위 안에서는 착하게 살았다. 심지어 불우이웃 돕기 자선바자회도 개최했으며 항상 부자이기 때문에 큰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식도 가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를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블루 재스민>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얌체 같은 사람들을 욕할 수 있는가, 욕은 할 수 있지만 해코지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건 너무 가혹하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신범을 욕하기는 주저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디 앨런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우디 앨런은 (영화로만 본다면) 냉소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만든 많은 영화들은 냉소와 자학을 기반으로 한다. 남들에게 냉소적이지만 스스로에겐 자학적인 태도를 갖은 주인공이 등장하기에 사람들은 그럭저럭 영화에서 타협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리 기분 나쁘지 않게, 아니 유쾌하게 영화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블루 재스민> 같은 영화는 이전의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만 놓고 보면, 우디 앨런은 여성 캐릭터를 괴롭히는 취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만났던 연인들, 헤어졌던 여자들,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뒤끝이 있었던 건 아닐까? 많은 영화에서 소심하면서 주도면밀하고 또 허당이었던 남자주인공(을 연기했던 우디 앨런 자신)처럼 감독인 본인이 영화를 통해 그녀들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건 분석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네요. 그냥 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우디 앨런은 그러고도 남을 캐릭터처럼 보이지 않나요?)
<블루 재스민>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와도 닮아 있다.
이 영화 또한 <블루 재스민>과 마찬가지로 여인에 대한 심술궂은 훔쳐보기 관점이 비슷하다. 게다가 비슷한 캐릭터도 나온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여주인공 시칠리아는 <블루 재스민>의 진저(재스민의 여동생)와 매우 닮았다. 수동적인 태도, 상처받는 데 익숙한 눈빛.
2010년대 이후의 우디 앨런은 좀 너그러워졌나 했는데, (그런 영화도 많은데) <블루 재스민> 시점에서는 아직도 쌩쌩하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