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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Dec 03. 2023

은판 위의 여인

사진에 남은 영혼들 혹은 사진에 빼앗긴 생명들의 이야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은판 위의 여인>(구로사와 기요시, 2016)을 봤다. 


이 영화는 사운드의 영화였다. 앰비언스를 통해 공포감이 들어왔다가 나가곤 했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프랑스에서 만든 이 영화에는 19세기 방식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스테판이라는 괴팍한 사진작가가 나온다. 그는 사람 크기의 은판으로 사진을 찍는다. 모델은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씩 꼼짝없이 서 있어야 한다. 당연히 현대인들은 그 시간을 참아내기 어렵다. 스테판의 아내가 모델이 되었지만 그녀가 갑자기 죽은 뒤에는 그의 딸 마리가 모델 역할을 한다. 이렇게 스테판은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아내와 딸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런 스테판에게 조수로 고용된 장은 마리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어느 날, 부동산업자로부터 스테판의 저택을 팔면 엄청난 금액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장은 거액의 수수료를 받는 조건으로 스테판을 설득하기로 한다. 그의 꿈은 수수료를 받아 마리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 하지만 스테판은 집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진에만 집착한다. 


그리고 여기에 슬며시 유령이 등장한다. 


스테판에게는 계속해서 죽은 아내가 나타난다. 사실 스테판은 모델인 아내를 학대하고 착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모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동안 꼼짝없이 포즈를 취해야 하니까) 중세시대의 고문기구를 연상시키는 고정기구를 사용하는가 하면, (나중에 밝혀지지만) 근육이완제를 사용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는 자살했고, 스테판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장도 마찬가지다. 그의 모든 관심은 스테판이 저택을 팔도록 하여 수수료를 챙기는 데 있다. 그러는 사이에 마리는 큰 사고를 당하고, 장은 스테판 몰래 마리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고 있다. 하지만 (*스포 있음) 마리는 예전에 죽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장이 마치 마리와 함께 있는 것처럼 혼자 대화하는 장면은 매우 기괴하다. (물론 마리가 유령일 거라는 힌트는 매우 많았기 때문에 <식스센스>급의 반전은 아니다.)


결국 스테판이나 장이나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적어도 자신의 욕망의 발현 때문에 죽은 이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불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작가나 조수나 똑같은 사람들만 모인 것 같다. 


은판에 새겨진 사진을 보면, 인물이 은판 안으로 들어간 것만 같다.

영화에서는 스테판에게 죽은 아이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부모가 등장한다. <디 아더스>를 보면, 옛날에는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사진을 통해 죽은 이를 기억하려는 태도겠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사진에 찍히면 영혼이 사라진다고 믿었던 것처럼, 사진에는 영혼이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러한 사진/영혼이라는 소재로부터 시작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몇 시간씩 사진을 찍히면서 스테판의 아내나 마리 모두 조금씩 은판에 영혼을 (혹은 생명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둘의 죽음은 모두 예정되었던 결말일 수도 있겠다. 


토요일,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정동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마찬가지로 극장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령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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