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꽉 깨물고 사는 인생에 대하여
핀란드의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1990년 작품 <성냥공장 소녀>를 봤다. 매년 마지막 날 즈음에는 항상 서울아트시네마를 가는데, 올해는 어제 방문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는 경향신문 건물까지 걸었는데, 정동길엔 사람 대신 눈만 가득했다.
<성냥공장 소녀>를 보면서 다시 떠올린 건데,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은 밝은 조명과 색채 속에 너무나 우울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볼 때마다 가보지도 않은 핀란드의 춥고 쓸쓸한 기운이 느껴진다. 차갑고 음울하고 조금은 코믹하기도 하다.
어제 갔던 서울아트시네마도 그랬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정동길에서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얀색으로 변한 종로의 한 건물 2층에는 북유럽의 90년대 영화를 보겠다고 여남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남자, 그리고 혼자였다) 이 쓸쓸한 악마들아. 나가서 친구들과 놀 것이지. 하긴 내 기억으로는 2007년에도 그랬다.
2007년 12월 25일 오후에 낙원동 시절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림자 군단>(장 피에르 멜빌, 1969)을 본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였는데 거의 만원에 가까운 관객이 들었다. 대부분 혼자 온 관객들. (물론 나도 혼자였다) 개중에는 알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애써 눈빛을 마주치지 않았더랬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다.
<성냥공장 소녀>의 주인공 이리스는 가여운 소녀다. 성냥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부모를 봉양한다. 클럽에 가도 말 거는 남자 하나 없다. 월급날(주급날일 수도 있다) 빨간색 원피스를 사서 집에 왔더니, 아빠는 천박하다며 따귀를 때린다. 그런 이리스에게 다가온 남자. 이리스는 그 남자와 금방 사랑에 빠지지만, 남자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이리스가 임신을 하자 그 남자는 "그 애새끼는 떼버려"라는 쪽지와 함께 수표를 보낸다. 이리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긋지긋한 인생이다.
문득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무셰트>(1967)가 생각났다. 가여운 소녀가 나오는 영화. 가엽다고 말하면 화를 낼 거 같은 성질머리를 가진 가여운 소녀는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성냥공장 소녀>의 이리스는 다른 선택을 한다. 물론 이리스의 선택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이리스가 되어 본 건 아니니,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무셰트>를 봤을 때보다는 덜 슬퍼서 좋았다. 아마도 <한공주>보다는 <죄 많은 소녀>의 엔딩에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궁금하다. 이 땅의 소녀들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맞다. 지금 보고 있는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도 참 힘들게 산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모든 군 전역자들이 자기 부대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듯, 말하려고만 하면 자신이 가장 힘들다고 할 것이다. 상대 비교는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에 버텨야 한다면 어금니 꽉 깨무는 수밖에 없다. 버티지 못했다고 해도 욕하면 안 된다. 그저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들었겠거니, 생각할 수밖에. 힘듦은 상대적이지 않다. 자신에겐 절대적이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훈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