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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킬러: 죽음의 여왕

<첩혈쌍웅>의 비장미 대신 매끄러운 액션을 선택한 오우삼

by 솔라리스의 바다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본 <더 킬러: 죽음의 여왕>. 초반부에 등장하는 성당과 비둘기를 보면서 굉장히 오우삼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맞았다. 오우삼 본인이 연출한 <첩혈쌍웅>(1989)의 공식 리메이크작.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봤다. (오우삼 감독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믿기도 어려우니까요.)

img.jpg 몇몇 장면은 <첩혈쌍웅>의 콘티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 일종의 팬 서비스랄까

영화는 재밌었다. 액션은 대단했고 (19금 액션이 많았다) <첩혈쌍웅>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35년이나 지난 만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심지어 주인공은 젊은 여성이다) <첩혈쌍웅>의 팬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장면들도 일부 패러디했다. (특히 지와 세이가 서로 총을 겨누다가 공동의 적을 사살하고 다시 서로 총을 겨누는 장면이라든지, 앞을 못 보는 젠을 사이에 두고 지와 세이가 자신들만의 언어로 대화를 한다든지 하는 장면은 <첩혈쌍웅>에서 그대로 따왔다) 그것뿐이랴, 성당과 촛불 그리고 슬로우 모션으로 날아가는 비둘기는 오우삼의 시그니처(생각해 보니 <첩혈쌍웅>의 상징이다)도 잔뜩 나온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첩혈쌍웅>과 오우삼과 80년대 홍콩 누아르 팬들의 추억팔이인가?


적어도 나는 그런 마음으로 본 것 같다. <더 킬러: 죽음의 여왕>을 보면서 <첩혈쌍웅>의 유사점, 전통과 계승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는 혼자 좋아했다. 하지만 <첩혈쌍웅>을 보지 않은 우리 가족도 즐겁게 봤다. 액션 설계가 좋았고 인물들도 신파적이지 않았으니까. (다만 젠의 역할과 비중은 다소 아쉬웠다) 무엇보다 결말이 <첩혈쌍웅>과 달라서 다행이지 싶었다.

<첩혈쌍웅>을 보던 시절, 나는 우정이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던 꼬꼬마였다

개인적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이 영화는 <첩혈쌍웅>의 리메이크작이지만, <첩혈쌍웅>의 비장미와 허무함, 쓸쓸함과 종말의 분위기는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우삼의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다.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1980년대의 홍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시절의 애처로움과 불안한 미래를 공감하기도 어렵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80년대 말, 홍콩 누아르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87 민주화 운동과 88 올림픽을 거치면서 느낀 거대 담론, 국가 주도 대형 이벤트의 실종과 허무함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어쨌거나 하루 종일 케이블 TV에서 보여주던 <해리 포터> 시리즈와 <나 홀로 집에> 시리즈를 번갈아 보다가 매끄러운 액션 영화 한 편을 봤다. 약간 잔인하지만 액션은 괜찮았던 추억의 영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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