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찾아서
요즘엔 왜 영화가 재미없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서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서사 말고 영화에 대한 나의 서사, 즉 영화 관람을 둘러싼 이야기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아직도 중딩 때 본 <대장부일기>(초원, 1989)라는 영화를 기억한다. 홍콩 누아르 시절의 주윤발이 출연했던 코미디영화. 당대 히트작인 <영웅본색>를 끌고 들어와 "영웅은 본래 색을 좋아한다"라는 식의 카피를 썼던 포스터까지 기억난다. 그 영화를 나는 부천의 어떤 극장에서 봤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친구와 나는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로 웃으며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단짝 친구와 함께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대장부 일기>에는 그런 개인 서사가 숨어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아주 많다. 영등포 영보극장인지 연흥극장에 <전쟁과 평화> 단체 관람을 갔다가 지루함을 못 참고 극장 복도를 뛰어다니며 다방구를 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찾아보니 러닝 타임이 217분이다!!) 물론 로맨틱한 기억도 있다. 반대로 가슴 아픈 기억도 있고.
지금은 어떨까?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전혀 없다. 덩달아 영화도 잘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지금도 아주 가끔은 영화보다 영화를 보던 풍경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비 오는 3월의 일요일 오후에 아무도 없는 예술영화관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를 봤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창 밖으로 비가 내리던, 그래서 습기 가득하고 고요했던 극장 분위기가 더 영화 같았다.)
지금은 공포영화보다 카드고지서가 더 무섭고, 멜로드라마보다 편안한 소파가 더 좋다. 즐거운 일은 모두 어릴 때 일어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