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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지금도 기억나는 그 아침의 햇살

by 솔라리스의 바다

얼마 전,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표현에 대해 다른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면>(콘도 요시후미, 1995)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떠올렸다. 후훗. <귀를 기울이면>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이겠지만 나에게 꽤 의미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일본 문화 개방 전, 불법복제 비디오테이프로 이 애니메이션을 봤다. 아주 옛날에, 나름 좋았던 시절에.


어릴 때 나는 사범대에 다녔다. 하지만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사람들과도 그닥 친해지지 못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가 다녔던 과는 얄미운 반장들만 모아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두 번째 대학이었다. 첫 번째 대학은 반년만에 자퇴를 했다. (물론 둘 다 부모님의 강권이긴 했지만) 두 번째 대학도 그만둘 순 없었다. 그래서 졸업만 바라며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었고 교생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대학 안에 있던 부속여자중학교였다. 나는 1학년에 배정되었다.


교생선생님은 무조건 인기가 많다고 누가 그랬나? 처음 일주일 동안, 교실은 냉장고보다 더 냉랭했다. 나도 14살짜리 여학생들에게 뭘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무한도전>에서 정형돈 씨가 '비인기 교생'이라는 캐릭터를 들고나왔을 때 완전 공감이었다. 실제 내가 그랬다니까요) 결국,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순정만화 덕분이었다. 당시 친구 중에는 순정만화를 무척 좋아하는 애가 있었다. 그 친구는 비디오/도서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무수히 많은 만화를 섭렵했더랬다. 나도 영향을 받아 유시진이나 천계영, 이정애(<열왕대전기>를 그린) 같은 작가의 만화들을 읽었다. 황미나는 당연했고.


사실 순정만화를 읽는 남자는 많지 않았다. 아니 내 주변엔 거의 없었다. 나역시 만화방에 가면 박봉성이나 이현세, 허영만을 읽곤 했으니까, <북두신권>이나 <드래곤 볼> 같은 만화를 읽거나 말이다. 어쨌거나, 순정만화를 경험한 덕에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녀석들은 때때로 굉장히 애매한 만화(이를테면, 교생선생님과 여학생의 연애 사건을 담은 일본 만화)들을 빌려주곤 했다. 아마 내 반응이 궁금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학생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처음으로 교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 담임 반 선생님은 베토벤 머리를 한 음악선생님이었는데, 그렇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성악을 전공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어서 교직으로 들어왔고 그냥 대충 산다고 했다. 나에게도 아등바등 살지 말라며 선생을 하면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해줬다. 반면에 내 교과목 담당 선생님은 (과 선배였는데) 너무나 열심히 일했다. 한 달 동안 그 양반이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수업에 진심이었고 상담과 교무업무에도 최선을 다했다. 너무 바빠서 늘 뛰어다녔고 가끔은 넘어지기도 했다. 두 양반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담임반 선생님처럼 살기는 싫었지만 교과목 담당 선생님처럼 생활할 자신은 또 없었다. 그래서 교생 마지막 날, 교장선생님이 주최한 평가회에서 "교사는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안 하려고요"라고 솔직하게 말했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후후.


그렇게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당시는 주 6일 제 시절이라, 토요일에 마지막 수업을 하고 학생들에게 편지와 선물을 받고 (놀랄 만큼 많이 받아서 산타 할아버지처럼 어깨에 이고 왔다. 정말로요) 간신히 집에 왔다. 너무 피곤했다. 어쩌면 긴장이 풀렸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와서 잠이 들었는데 그만 다음날 아침까지 자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아침 6시였다. 싱그러운 5월 마지막 날 즈음의 햇살이 내 방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푹 자고 일어나 굉장히 포근한 기분, 교생실습에서의 해방감, 뭔지 모를 두근거림으로 충만했다. 그때 내 눈에 띈 게 <귀를 기울이면> 비디오테이프였다. 녹화용 테이프에 까만색 사인펜으로 대충 휘갈겨 쓴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글씨를 보면서, 저 테이프가 왜 여기 있지?라고 잠깐 의아해했다. 실은 일주일 전쯤, 친구에게 빌렸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 누워 느긋한 마음으로 비디오를 재생했다.


<귀를 기울이면>은 작가가 되고 싶은 시즈쿠의 이야기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답게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바이올린 제작 장인이 되려는 세이지를 만나고, 자신의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귀엽고 신비스러운 야옹이도 나오고.


이 애니메이션은 당시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언덕 위의 주택가, 도서관, 여름, 바람, 괜찮은 음악 그리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뒤,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일생에 몇 번 경험하지 못할 기분일 것이다. 작품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즐겁고 소중하고 기쁘고 감사했다. 음악과 캐릭터와 풍경의 모습, 나뭇잎 사이의 햇살은 또 얼마나 잘 그렸는지, 밤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얼마나 또 현실적인지. 대개의 '마이 훼이버릿'(노래든 영화든 소설이든)이 그러하듯,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이건 내 거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애니메이션 주인공 또래인 여중생들과 한 달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때 내가 졸업 후 뭘 하지,라고 고민하다가 막연하게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무렵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순히 봄의 햇살, 이제 여름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아름다운 신록과 공기에 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은 너무나 잘 만든, 그리고 이 작품만 연출한 뒤 갑자기 사망한 연출자 콘도 요시후미와 그를 후원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탁월한 재능 때문일 수도 있고.


<귀를 기울이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아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작품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는 내 생애의 일부분, 환희, 고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억 같은 게 잔뜩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게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개는 어릴 때 얻은 것으로 채워지고 그 걸 자양분 삼아 어찌어찌 생활을 영위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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