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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un 26. 2022

더 문

개인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어떻게 견뎌야 할까?

<더 문 moon>(던칸 존스, 2009)은 저예산의 미덕을 담은 SF영화다. 물론 사람들이 기대하는 액션 판타지 영화는 아니지만.      


(스포 있음) 샘(샘 락웰)은 에너지기업 ‘루나’에 소속된 계약직 근로자이다. 달에서 청정에너지를 채취하는 기지를 혼자서 지키고 있는데, 계약기간 3년이 끝나면 집에 갈 수 있다. 그러나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 지구와의 통신이 두절되고, 샘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환영이 보이는 등 정신마저 불안정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샘은 기지 밖에서 사고를 당하는데, 눈을 떠보면 어느새 기지 안 의무실에 누워있다. 샘은 운영 컴퓨터 거티(케빈 스페이시의 목소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망가진 기계를 고치러 갔다가, 운전석에서 쓰러져 있는 자신과 똑같은 샘을 발견한다. 샘을 안고 기지로 돌아온 샘. 두 명의 샘은 서로를 보며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결국 밝혀진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들은 달 기지를 위해 일하는 3년 수명의 복제인간이며, 앞서 일하던 샘의 수명이 다한 줄 알고, 자연스럽게 다음 샘이 깨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샘이 죽지 않으면서 선임과 후임이 공존하고, 샘(들)에겐 숨겼던 비밀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 영화는 치밀하게 짜인 시나리오에, 주인공 역을 맡은 샘 락웰의 인상적인 연기가 잘 어우러져,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2인극임에도 불구하고 팽팽한 긴장감과 인상적인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건조한 달 표면과 푸른 지구의 모습 등 아름다운 우주적 풍경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훌륭한 점은 뛰어난 주제의식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샘. 현대사회의 거울과 같은 상황들.


영화 속에서 샘이 회사와 맺은 ‘계약기간 3년’은 복제인간의 수명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 사람들에겐 ‘2년 계약직 인턴’을 떠올리게 한다. 어차피 실업은 죽음과도 같기 때문에, 복제인간의 수명이나 기간제 근로자의 수명이나 매한가지다. 

게다가 희망고문도 비슷하다. 영화에서는 ‘3년 간 열심히 일하면,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말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2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으로 뽑아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3년이 되면 다른 복제인간으로 대체되듯, 인턴들도 2년이 지나면 다른 인턴으로 교체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든 정규직을 뚫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할까? 처연하게 거부하고 시간제 근로자의 삶을 살아야 할까? 당연히 정규직이 좋겠지만, 그러한 노력 자체가 어쩐지 체제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왠지 아니꼽다.)     


이 영화의 서정성과 슬픔이 잘 표현된 곳은 후반부의 한 장면이다. 

죽어가는 샘은 회사에서 세운 전파방해 안테나를 피해 화상전화를 시도한다.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걸어 테스를 찾는 샘. 하지만 테스는 죽은 지 오래되었고, 전화를 받은 소녀는 아가의 모습으로만 보아오던 자신의 딸 이브였다. 그녀는 올해로 15살. 전화를 끊은 샘은 오열한다. ‘집에 가고 싶어.’ 샘은 집에 가고 싶다. 자신의 (조작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실제 집에 가고 싶지만, 돌아갈 집은 없다. 그리고 화면에는 외로운 달 표면의 월면차와 저 하늘에 빛나는 지구의 모습이 보인다. 차 안의 샘은 울부짖고, 그 위에 떠있는 지구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렇다. 이 영화의 제목은 달(MOON). 달은 지구의 위성이다. 지구를 돌며, 지구를 바라보는, 지구에 종속된 외로운 별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지극히 영화적인 표현으로 복제인간 샘이 그리워하는 실제 인간 샘의 집을, 달과 지구의 관계를 대비시켜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6번째 복제인간 샘(앞서 5명의 샘이 있었다!)은 달을 떠나 지구로 향한다. 그리고 복제인간에 대한 진실을 폭로한다. 그래도 당장 그의 수명이 늘어나진 않을 것이다. 조작된 기억으로 인한 슬픔과 상실감 또한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가 계산해 넣지 않았던 부속품의 반란이다. 하찮은 것들의 존재 증명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대로 죽어갈 수는 없다. 꿈틀거리기라도 해야 한다. 결국 개인은 조직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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