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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Apr 11. 2023

베를린 천사의 시

빔 벤더스 감독님을 눈앞에서 봤던 기억

언제였더라. 옛날에 극장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빔 벤더스, 1987)를 본 적이 있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심심한데 재미있는, 이상한 영화다.

비디오로만 봤던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한다고 해서-무슨 무슨 특별전이었다-한걸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매진이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영화만큼은 꼭 극장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나 보다. 여차하면 서서라도 보겠다고 사정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영화 시작 직전, 매표소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를 끊은 직원은 매표소 앞에 서 있던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예매표 한 장이 취소되었는데요. 혹시 구입하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그 표를 받아 들었다. 직원분의 입장에서는 일찌감치 매진이 되었다고 말했는데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한 시간 인가 기다리던 내가 몹시 신경 쓰였을 수도 있었겠다. (그 극장은 일반 매표소처럼 유리문을 사이에 둔 곳이 아니라, 커피숍 데스크처럼 뻥 뚫린 곳이었다.)


종로 2가 씨네코아. 


그곳에서 수많은 영화를 봤지만, <베를린 천사의 시>는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뒤늦게 앉은 좌석은 앞쪽에서 4~5번째 줄 그리고 중앙, 위치도 좋았다. 그곳을 예매한 사람은 무척 일찍 자리를 맡았던 게 분명했다.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취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몰랐는데) 빔 벤더스 감독의 GV가 있다고 했다. 세상에. 하지만 사실 나에겐 막차 시간이 있었다. 당시 지방에서 살고 있던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울역의 막차 시간이 마음에 걸렸다. 원래대로 라면 영화를 보고, 기차를 타러 가면 시간이 딱 맞는데 말이죠. 


결국 감독님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자, 싶어서 쓸 수 있는 모든 자투리 시간을 다 썼다. 감독님의 이야기가 끝나고 질문을 받을 때였다. 일순 조용,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원래 GV를 가보면 대부분 그렇다. 처음엔 질문을 하지 않다가 시간이 갈수록 질문의 향연이 된다) 


그 순간이었다. 


진행하시는 분이 질문이 있냐고 물어보고, 조용한 좌중을 돌아보고, 감독님께 처음이라 질문이 없는 것 같다고 (통역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소소하게 웃고 나서 다시, 질문이 있냐고 물어보는 순간, 그 순간에 내가 일어났다. 더 이상 지체하다간 막차를 놓칠 것 같기에.


모든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진행하시는 분과 감독님도 나를 쳐다봤다. 내가 질문자인 줄 알았나 보다. (타이밍이 그렇긴 했다) 내가 그때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감독님 영화를 잘 봤다. 너무 좋아하는 감독님이다. 하지만 난 지금 막차를 타야 한다. 그래서 먼저 일어나서 가야 하는데, 미안하다. 좋은 시간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없이 고요했다. 그리고 감독님의 얼굴이 정면에 보였다. 숨이 막혀서, 멍하니 서 있다가, 그만 뚜벅뚜벅 걸어서 밖으로 나왔다. 그때 나를 따라오던 눈길들, 내 등에 부딪히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감독님의 의아한 표정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후회한다. 어찌나 후회가 되는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그때 인사를 나눴어야 했는데. 그러면 서로에게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어디 그것뿐이랴. 제1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때 GV에서 봤던 <리포맨>. <시드와 낸시>의 알렉스 콕스 감독님께도 말을 걸지 못했다. 두고두고 아쉽다.) 


무엇보다 감독님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저는 감독님이 싫어서 나간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영화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비디오로 볼 때는 맨날 졸았지만, 그날은 졸지 않았고요. 큰 화면으로 독일의 하늘에 서 있는 천사들을 마음껏 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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