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라 1>의 숨겨진 이야기
최근 <웨일>(대런 아로노프스키, 2022)이 개봉하면서, 브렌든 프레이저에 관한 뉴스가 자주 나온다. 그는 거기서 고래처럼 거구를 가진 찰리를 연기했다. 그리고 이 영화로 브렌든 프레이저는 생애 처음 아카데미 남우주연사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미이라> 시리즈의 그 잘 생긴 액션배우가 어쩌다 저렇게 역변했느냐라는 한탄으로 이어진다. 그러게 말이다. 한때 그는 역동적인 캐릭터에 잘 어울렸다. 굉장히 잘 생긴 것도 아니고 액션에 능한 것도 아니었지만, <미이라> 같은 영화에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브렌든 프레이저를 떠올리고, <미이라>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이 브런치는 영화/극장에 얽힌 이야기를 담는 곳입니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부지런히 적으려고요.)
<미이라 1>(스티븐 소머즈)은 1999년 여름에 개봉했다. 1999년, 근사한 해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나에게도 굉장한 일이 많았다.
당시 나는 토요일 밤, 서울로 올라와 스카라 극장에서 있었던 심야영화 프로그램을 관람했다. <매트릭스>(워쇼스키 형제, 1999),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로저 컴블, 1999), 그리고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가이 리치, 1998), 이렇게 세 편을 연속 상영하는 행사였다. 아마도 이들 영화를 수입했거나 배급했던 회사에서 기획한 행사였을 것이다. 나는 너무 좋았다. 5월에 개봉했던 <매트릭스>를 놓쳤기 때문이다.
혼자서 어슬렁, 세 편을 다 봤다. (연인처럼 보이는 관객들은 중간에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매트릭스>는 정말 끝내줬고,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는 placebo 노래가 나왔으며,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의 재치는 즐거웠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왔더니 새벽 6시나 되었을까나.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사실 나는 전날 외박을 나온 군인이었고, 그날 바로 복귀를 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잠을 청했다. 일요일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당시 2호선은 1시간 3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돌았다. 자다가 눈을 떠보면 시청역이고, 다시 자다가 일어나면 시청역이고, 또다시 눈을 뜨면 시청역이거나 을지로 어디쯤이었다. (처음엔 한 바퀴 순환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시계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렇게 세 바퀴를 돌았을 때,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온몸이 어디 구겨진 채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었다. 뼈와 근육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기차를 타고, 복귀를 해야 한다. 우울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영화가 바로 <미이라 1>이었다.
피카디리 극장. 오전인데도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영화표를 끊고 (다행히 현장표가 있었다!) 로비에 들어섰다가, 그녀를 만났다. 아주 오래전에 만났다가,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분이었다. 순간 멈칫했는데,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잠시 인사를 건네도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행이 없어도 아는 척을 하지 못했을 거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도 한 동안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랜 기억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고 미안하지만) 어느 순간, 영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미이라 1>은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상업영화였다. 적당히 재밌고, 유머스럽고,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영화 속 브렌든 브레이저 또한 매력적이었다. <원시 틴에이저>(레스 메이필드, 1992) 같은 영화도 재미있었는데, 바야흐로 인생의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서둘러 로비로 나갔다. 멀찌감치 그녀의 흔적을 좇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극장 로비는 영화를 본 사람과 보려는 사람으로 뒤엉키고 있었다. 당시의 피카디리, 당시의 종로 3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으니, 그렇게 우연히 딱 마주치는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서울역으로 향했다. 기차를 기다리며, 미제 담배를 피우려는 찰나 (난 군대에서 담배를 배웠는데, 당시에는 꼴에 외국담배만 피웠다) 담배 한 개비를 달라는 노숙자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 엄마는 X녀였지"라는 말로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담배를 건네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새 다른 노숙자 동료들이 모여들었고, 그의 얘기를 듣느라 새로 뜯은 담배 한 갑을 모두 쓰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의 고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녀는 다신 만날 수 없었다.
레이첼 와이즈는 여전히 예쁘고, 브렌든 프레이저는 <더 웨일>에 출연했고, (이 영화를 만든 아로노프스키는 인물 탐구에 변태적인 진심을 가진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랜만에 <미이라 1>을 다시 봐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