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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Mar 12. 2023

그때 극장에서 누굴 만났더라

<미이라 1>의 숨겨진 이야기

최근 <웨일>(대런 아로노프스키, 2022)이 개봉하면서, 브렌든 프레이저에 관한 뉴스가 자주 나온다. 그는 거기서 고래처럼 거구를 가진 찰리를 연기했다. 그리고 이 영화로 브렌든 프레이저는 생애 처음 아카데미 남우주연사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미이라> 시리즈의 그 잘 생긴 액션배우가 어쩌다 저렇게 역변했느냐라는 한탄으로 이어진다. 그러게 말이다. 한때 그는 역동적인 캐릭터에 잘 어울렸다. 굉장히 잘 생긴 것도 아니고 액션에 능한 것도 아니었지만, <미이라> 같은 영화에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브렌든 프레이저를 떠올리고, <미이라>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이 브런치는 영화/극장에 얽힌 이야기를 담는 곳입니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부지런히 적으려고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브렌든 프레이저가 젊은 시절의 권오중 배우와 닮은 것 같다.

<미이라 1>(스티븐 소머즈)은 1999년 여름에 개봉했다. 1999년, 근사한 해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나에게도 굉장한 일이 많았다. 


당시 나는 토요일 밤, 서울로 올라와 스카라 극장에서 있었던 심야영화 프로그램을 관람했다. <매트릭스>(워쇼스키 형제, 1999),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로저 컴블, 1999), 그리고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가이 리치, 1998), 이렇게 세 편을 연속 상영하는 행사였다. 아마도 이들 영화를 수입했거나 배급했던 회사에서 기획한 행사였을 것이다. 나는 너무 좋았다. 5월에 개봉했던 <매트릭스>를 놓쳤기 때문이다. 


혼자서 어슬렁, 세 편을 다 봤다. (연인처럼 보이는 관객들은 중간에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매트릭스>는 정말 끝내줬고,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는 placebo 노래가 나왔으며,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의 재치는 즐거웠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왔더니 새벽 6시나 되었을까나.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사실 나는 전날 외박을 나온 군인이었고, 그날 바로 복귀를 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잠을 청했다. 일요일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당시 2호선은 1시간 3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돌았다. 자다가 눈을 떠보면 시청역이고, 다시 자다가 일어나면 시청역이고, 또다시 눈을 뜨면 시청역이거나 을지로 어디쯤이었다. (처음엔 한 바퀴 순환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시계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렇게 세 바퀴를 돌았을 때,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온몸이 어디 구겨진 채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었다. 뼈와 근육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기차를 타고, 복귀를 해야 한다. 우울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영화가 바로 <미이라 1>이었다. 


피카디리 극장. 오전인데도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영화표를 끊고 (다행히 현장표가 있었다!) 로비에 들어섰다가, 그녀를 만났다. 아주 오래전에 만났다가,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분이었다. 순간 멈칫했는데,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잠시 인사를 건네도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행이 없어도 아는 척을 하지 못했을 거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도 한 동안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랜 기억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고 미안하지만) 어느 순간, 영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미이라 1>은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상업영화였다. 적당히 재밌고, 유머스럽고,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영화 속 브렌든 브레이저 또한 매력적이었다. <원시 틴에이저>(레스 메이필드, 1992) 같은 영화도 재미있었는데, 바야흐로 인생의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레이첼 와이즈의 영화 아닌가. 그녀의 매력은 <미이라 1>에 가득 담겨 있다.

영화가 끝난 뒤, 서둘러 로비로 나갔다. 멀찌감치 그녀의 흔적을 좇았으나 찾을 없었다. 극장 로비는 영화를 사람과 보려는 사람으로 뒤엉키고 있었다. 당시의 피카디리, 당시의 종로 3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으니,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서울역으로 향했다. 기차를 기다리며, 미제 담배를 피우려는 찰나 (난 군대에서 담배를 배웠는데, 당시에는 꼴에 외국담배만 피웠다) 담배 한 개비를 달라는 노숙자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 엄마는 X녀였지"라는 말로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담배를 건네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새 다른 노숙자 동료들이 모여들었고, 그의 얘기를 듣느라 새로 뜯은 담배 한 갑을 모두 쓰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의 고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녀는 다신 만날 수 없었다. 


레이첼 와이즈는 여전히 예쁘고, 브렌든 프레이저는 <더 웨일>에 출연했고, (이 영화를 만든 아로노프스키는 인물 탐구에 변태적인 진심을 가진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랜만에 <미이라 1>을 다시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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