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식(食)구(口)-관찰일지

#리지관찰일기

by 리지사비



1

쿠쿠쿠쿠쿠-

쿠쿠쿠쿠쿠쿠쿠-

취이이이이이익-



밥 짓는 매 순간마다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새 식(食)구(口).



올해는 마음을 먹었다.

요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밥통을 먼저 들이기로.


그렇게 나의 집에

압력밥솥, 일명 '밥통'이 새로 들어왔다.



2

어느 순간 저녁마다

밥 짓는 소리가 흐른다.

먹는 밥의 찰기가 달라진다.


전자레인지가 뚝딱 만들어내는

밥에 익숙했었는데

새 식구 덕분에

집에서 먹는 저녁밥이 기다려진다.



3

10년 전 일본 여행에서 사 온 토끼 주걱.

그저 인테리어 소품이었던 토끼 주걱에게

비로소 '쓰임'이라는 생명력이 생긴다.


냉장고도 점차

밥과 보조를 맞추는 식자재들로 채워진다.

파스타 중심의 재료들 사이로

간장, 식초, 다진 마늘, 새우젓갈, 된장, 고추장...

낯설고 정겨운 양념장들이 한 칸을 차지한다.


배달 앱의 알림과는 점차 멀어지고

싱크대 위에는 온기를 머금었던 밥그릇이 자주 놓인다.



4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쌀의 종류들을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건강을 위해서 현미를 사면서도

찰기를 포기할 수 없기에 고시히카리를 섞는다.



-

요즘 가장 소소하고도 행복한 순간은

취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멜로디 뒤에

밥통의 뚜껑을 여는 찰나이다.


그때 뿜어져 나오는 뽀얀 연기는

오직 그 순간에만 허락되는 환대이다.

바다의 윤슬보다도, 조개가 품은 진주보다도

더 곱고 빛나는 밥알의 빛깔 또한

그 순간에만 허락되는 장관이다.


가장 순수하고 하얀 갓 지은 밥을 보고

감탄을 내뿜은 뒤

토끼 주걱을 들어 나름의 의식을 치른다.

밥 위에 정성스레 십자가를 긋고

부드러운 균열을 내는 일.


첫 밥과 조우하는 이 짧은 의식이

요새 나의 가장 소소하면서도 뜨거운 행복이다.



5

이렇게

밥통 이라는 새 식구가

내 인생에 들어왔을 뿐인데


나의 행동과

시간의 쓰임새와

행복의 결이 달라진다.


그저 하나뿐인 사물과의 관계 맺기만으로도

삶의 풍경이 이리 달라지는데

전혀 몰랐던 누군가가 내 삶에 들어온다는 것은

얼마나 더 큰 지각 변동일까.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는 지금,

나는 마음을 조금 더 열어두고 보려 한다.


다가올 변화의 그 기쁨을

기꺼이.

그리고 맛있게 받아들이려 한다.


밥맛이 좋아요 (의도된 진밥)
설레는 취사 소리




#밥통일지

#자다 일어나서 밥 한 숟갈 퍼먹고 잠든 적도 있..

#밥통조하 #아이러브밥통

#쿠O광고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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