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一日)관찰일지 (2)파괴자의 질문, 평범한 대답

리지관찰일지

by 리지사비

일일(一日)관찰일지 (2)

<파괴자의 질문, 평범한 대답>



1

시기를 놓쳐 보지 못했던 영화 <오펜하이머를>를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마주했다.

그리고 처음 본 장면 속에서 서늘한 문장 하나가 흘러나왔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자신의 성취가 수만 명의 목숨을 거두는 기술이 되었음을 알아챘을 때, 오펜하이머는 어떠한 심정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았을까.

기술의 실체를 마주한 순간. 멈출 수 있었을까.

그 무거운 책임은 과연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 걸까.


그 질문은 영화 밖으로 걸어 나와

나의 오늘을 계속 서성인다.



2

불과 몇 년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전을 볼 때만 해도,

세상이 모두 놀랄만한 결과였지만 다들 거실에 앉아서

‘It’s not my job’라는 생각으로 관전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AI는 어느새 나의 일상과 업무 깊숙이 스며들었다.

제미나이와 챗GPT는 이미 모든 것의 디폴트 값이 되어버렸다.


내 업무도 대체될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에 프로젝트와 업무의 과정을 도식화하며 Gems로 구현해 봤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된다’.


AI로 효율적인 업무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짧은 성취감 뒤로 나의 노동력이 대체가 된다는 사실에 어딘가 불편해진다.


사람에게서 노동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월-E 속 무기력한 인류가 우리의 미래일까.


정당한 노동의 가치가 희미해지고,

나의 경쟁력이 흐릿해지는 지금

한낱 작은 점 같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것에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마음속 어딘가에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로

혼란스러워진다.



3

이러한 질문들이 계속 서성이고 있을 때

우연히 한 전시를 만났다.


<평범한 하루의 온도>


사실 요즘의 일상이 평범하지 않았기에

그 제목에 더 깊게 꽂혔는지도 모르겠다.

전시관을 채운 헤일리 티프먼의 작품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햇살의 각도와 찻잔 위로 조용히 피어오르는 온기에 대하여.


작품 속 헤일리가 담아낸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그 평범한 시간을 천천히 누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

막 식어가는 잔열이 남아 잇는 공간

거리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

이러한 찰나적인 경험이 감직한 감정의 밀도를

자신만의 관찰과 감각으로 조용히 펼쳐 보인다.




4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그 어떤 특별한 기술도
결국

'지금, 여기'의 온도를 느끼는

감각까지는 대체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충분히 느끼며 감사히 지내면 되는 것 아닐까.


기술이 세상을 흔들 때

특별함 없는 하루가 우리를 다시 붙잡고


거대한 질문이
나를 흔들 때


평범한 하루의 온도가
나를 다시 붙잡아 준다.



5

관찰은 다시 나를 향한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시선

그리고 오늘 내가 맺은 사소한 관계들.


비록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나는 여전히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그 점들이 모여
그려내는 오늘의 온도는 그 무엇보다 선명하다.


불안한 미래 속에서도
나는 오늘의 평범함을 깊게 관찰한다.
그 안에서 다시 동력을 얻어본다.


#평범한 하루의 온도

헤일리 티프먼 <평범한 하루의 온도>

매거진의 이전글새 식(食)구(口)-관찰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