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너머의 소통
나는 백 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쓴 것을 읽을 사람들이
거기 아직 살아남아 있으리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한강, ‘백 년 동안의 기도’ 중에서
한강 작가 덕분에 한국인들은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을 모국어로 읽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작가에게 감사한 일이지만, 독자로서 애석한 점도 있다. 우리는 한강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을 수는 없다. 작가의 미발표작 1편은 2114년이 되어야 노르웨이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그때까지 작가의 미공개 원고는 오슬로 시립도서관에 봉인된 채 보관된다. 2014년부터 매년 작가 한 명을 선정해 100년 뒤 100권의 책을 내는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다.
2019년에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한강 작가는 그 소감을 ‘백 년 동안의 기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밝혔다. 한 인간의 생애를 넘어서는 100년의 시간 앞에서 작가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떠올린다. 글쓰기와 독자의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기획이 지속되기 위한 위태롭고 불확실한 전제들을 가늠해 본다. 그의 글이 미래 세대에 닿으려면 그때까지 종이책과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어야 하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들이 이 일을 이어가야 한다.
작가는 결국 이 프로젝트가 ‘기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소멸되었을 지금의 세계를 소중하게 여겨 여전히 소통하려는 사람들이 미래에도 이어질 거라는 ‘희망’은 계획하는 프로젝트라기보단 어쩌면 믿음의 영역이다.
한강 작가의 글을 새삼스럽게 떠올린 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타임캡슐을 묻었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올해 제헌절은 여느 해와 달리 특별했다. 12.3 비상계엄 이후 맞이한 첫 제헌절이었기에 경축식에는 국회 앞에서 계엄군 전술차량을 막은 시민 대표가 참석했고 국회를 경호한 사무처 경호기획관실은 감사패를 받았다.
국회 잔디광장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대한민국 국회’라는 문구를 새긴 상징석도 놓였다. 상징석은 국회 경내에 있던 자연석을 이용했다. 그 아래에는 본회의장에서 사용하는 의사봉과 국회의원과 직원들의 메시지 등이 담긴 국회 타임캡슐이 묻혔다. 계엄과 탄핵의 역사를 목격한 바위처럼,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민주주의의 가치를 미래 세대에게 전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타임캡슐은 100년 뒤에 개봉될 예정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22대 국회는 세종의사당 설치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세종의사당은 공식적으로는 분원이지만, 여의도 의사당의 2배 규모니 국회의 완전 이전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예산 타당성이 검토되고 있고, 내년에는 세종의사당 설계가 본격 시작될 예정이다. 그러니까 100년 뒤에는 국회의사당이 지금과 같은 장소일지 불확실하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을 키우는 주체는 다름 아닌 22대 국회다. 비상계엄 해제를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묻으면서, 동시에 그 역사의 현장인 국회의사당의 이전을 추진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날 행사를 이끈 우원식 국회의장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국민들 속에 또 하나의 민주주의 성지로 인식되기까지 참으로 험난한 헌정사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타임캡슐이 열리기 전에 국회가 여의도를 떠나거나, 타임캡슐을 세종으로 옮기면 '민주주의 성지인 국회의사당'이라는 장소성과 진정성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국회가 떠난 여의도에 타임캡슐만 덩그러니 남겨두든, 100년이 되기 전에 타임캡슐을 굴삭기로 파내어 세종의사당에 옮겨 묻든 비상계엄 해제의 상징물이 머지않아 애물단지가 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이에 비해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은 장소가 시간을 품는 방식으로 소멸 너머의 소통을 시도한다. 오슬로 외곽에는 이 기획을 위해 1,000그루의 나무들을 심은 숲이 있다. 해마다 선정되는 작가들은 100년간 이 숲에서 당대의 독자들과 소통하고, 이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나무들은 100년 뒤 책을 위한 종이가 되어 미래의 독자들에게 작가의 이야기를 다시 전달할 것이다. 필멸의 운명인 개별 인간은 사라져도 보편적인 인간성은 존재하고, 인류는 시간을 뛰어넘어 본질적인 가치를 알아보고 이어갈 거라는 믿음이 이 취약하지만 간절한 방식에 담겨있다.
국회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이름을 스스로 새기기까지 우리가 목격한 일련의 사건들은 동시대인들에게만 뜻깊은 경험이 아니다. 시민들이 친위 쿠데타를 저지해 민주주의를 지켜낸 역사는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의 성숙과 공동체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세계가 소멸하더라도 공동체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시민 의식은 다음 세대가 이어갈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기억하는 이들이 미래에도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타임캡슐은 그 역사적 경험을 미래의 시민과 매개하기 위한 장치다. 특정 시대의 기록을 보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시민들에게 계속 대화를 건넬 수 있을 때 타임캡슐은 비로소 100년 간 존재할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과거와의 대화는 진정성 있는 장소가 보존될 때 효과적이다.
국회 이전을 추진하면서 떠날지도 모를 자리에 묻은 국회 타임캡슐에는 미래 시민과의 소통을 위해 간절히 고민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상계엄 해제를 이끌어 낸 주역들에게는 그래도 의미 있는 기념물일지 모르겠지만, 미래 세대에게 건넬 메시지라는 점에서는 그 형식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