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가면 기분이 좋다. 서류마다 시간을 돌이킨 듯 만 나이가 찍혀 나온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제 내 나이를 남의 것처럼 매번 낯설게 헤아린다. 병원 검진이 무슨 좋은 일이겠느냐만 의료기관이 인정하는 나이가 이름 옆에 선명하게 기재된 걸 보면, 아직은 괜찮을 거라고 숨을 돌리게 된다. 한국 여성의 중위 연령은 48.2세, 세상에는 여전히 나보다 손윗세대가 더 많다.
내 인생은 얼마나 남았을까. 2023년 기준 통계청 생명표에 따르면, 내 출생연도 여성의 기대수명은 69.9세다. 기준연도에서 2년이 지났으니, 이제 24년이 남았다. 오래 살기를 소망한 적은 없지만 남은 시간을 가늠해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거꾸로 24년 전을 떠올리면 아날로그 화면 같은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떠오르는데, 남은 날이 고작 그뿐이라니.
동갑내기에게 얘기하니 “너는 그거보다 오래 살 거야”라고 다정하게 핀잔을 준다. 그 말이 맞다. 우린 사망률이 높은 영유아기를 살아 넘겼으니, 함께 태어난 전체 집단의 평균보다 기대수명이 길다. 그래서 2023년 기준으로 내 또래 여성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인지를 추산한 기대여명은 43.4년으로 예상된다. 기대여명은 갈수록 길어지는 추세니, 무탈하게 살아간다면 내 여명도 이보다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종합하면, 나는 그럭저럭 인생의 절반 지점에 서있는 셈이다.
다만 기대여명이 고스란히 온전한 삶이 되기는 쉽지 않다.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린 오스트레일리아 분자생물학 연구진의 DNA 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수명은 38세에 불과하다. 현대인의 장수는 의학과 생활양식의 발전으로 질병을 통제한 결과일 뿐, 자연이 인체에 허락한 생물학적 수명은 마흔을 넘기지 못한다.
그 나이 무렵 나는 일상을 위협하는 건강의 위기를 연달아 겪었다. 아픈 몸은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나는 문제의 원인을 찾는 데 한동안 골몰했다. 의사들이 설명한 동영상을 보고 대형병원의 질환 안내를 읽는 것으로 모자라 관련 학회의 표준 치료 가이드라인과 최신 논문을 확인하고 환자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매일 접속했다. 그러다 저 논문을 소개한 기사를 보고서야 발병의 원인 찾기를 그만뒀다. 그저 노화일 뿐 어딘가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된 것이다. 인생의 남은 절반은 조금은 정상이 아닌 몸으로 살아가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이 압축적 근대화에 시달린 한국인은 부모 세대보다 빠르게 늙어가는 가속 노화를 겪고 있다. 우리 가족도 그 흐름을 벗어나지 않았다. 1919년에 태어나 시골에서 평생을 보내신 할아버지는 89세로 장수하셨고, 할머니도 비슷하게 미수를 누리셨다.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도시에서 생활한 아버지는 73세에 일상생활에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인 장기요양 1등급을 받았다. 외가 쪽 장수 성적은 더 좋지 않다. 그다음 세대인 나는 부모님이 경험해보지 않은 밤샘 근무를 20여 년째하고 있다. 이제는 하룻밤을 새면 노화 시계의 속도가 빨라지는 걸 온몸으로 느낀다.
2년 전 요양병원에서 침상 생활을 시작한 아버지께 하고 싶으신 게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회고록을 쓰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함께 목차를 정했지만, 진도를 더 나갈 수는 없었다.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말하는 것도, 읽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멋진 손글씨를 써 내려가던 손은 입원하기 전에 이미 펜을 쥘 수 없는 상태였다. 아버지의 기억은 당신의 스러지는 몸 안에 오롯이 잠겨버렸다.
그러니 인생의 하프타임에서 지난 시간을, 그 시간이 어린 장소를 돌아보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말했다. ‘40세는 청춘의 노년기이다. 50세는 노년의 청춘기이다.’* (그는 83세까지 살았다.)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김명남 옮김. 문학동네, 2010.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