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국문과에서 현대 시 수업을 담당한 교수님은 초로의 시인이었다. 흐트러진 회색 머리카락 아래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났고 걸음걸이는 구름을 밟는 듯했다. 시인에겐 과연 남다른 오라가 있어, 학생들은 시인에 대한 환상을 키워갔다.
수업은 교수님이 선정한 작품을 학생들이 돌아가며 발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날은 함께 수강한 동기가 발표할 차례였다. 친구의 발제가 끝나자, 교수님은 그에게 시골 출신인지 물으며 관심을 보였다. 중학교까지 경북 의성에서 자란 친구였다. 그 정도면 감수성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며, 시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나는 그 친구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는 가을 들녘을 묘사한 시를 발제 과제로 받고 쩔쩔매던 참이었다. 그때까지 지평선을 본 적조차 없었으니, 노을이 하관(下棺)처럼 내려앉는 지평선 풍경에서 소멸을 읽어내기는 버거웠다. 유감스럽게도 문학 감수성을 키울 만한 어린 시절의 환경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고향은 부모의 결정으로 정해지는 일종의 귀속 지위다. 그 후 나는 무딘 감성을 성장기에 겪은 세 번의 이사와 위성도시의 따분한 생활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파편화된 성장 배경을 재능 부족의 핑계로 둘러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무렵 강의실 밖에서는 소설가 김영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만 6차례 이사했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10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잃어버렸다고 한다. 강원 출신이라지만 토속적인 정서가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장소 기반의 관계가 없는 도시인의 감성을 하드보일드한 스타일로 구축해, 동시대와 호흡하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을 선보였다.
친구의 고향인 의성에 내가 직접 간 건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다. 문상을 가는 길이라서였을까, 그곳의 첫인상은 기대했던 전원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래전 그날의 시 수업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당시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했던 시인의 고향은 찾아보니 서울 용산이었다. 토착적인 농촌 세계를 통해 생명의 감각을 학생들에게 일깨워 주려 했던 시인도 실체적 공간에서 그 감각을 체득한 건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시인이 이상향으로 삼은 서정적인 농촌은 상상의 장소인 문학적 고향이라는 걸 깨달았다.
흔히 고향은 정체성이 형성되는 장소로 여겨지지만, 현대인의 삶은 그런 통념과 거리가 있다. 2023년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이사 횟수는 3.4회이고, 이사 경험이 없는 사람은 4명 중 1명에 불과하다. 현 가구주를 기준으로 한 조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생애 전체에서 볼 때 정착보다는 이동의 경험이 더 보편적이다. 현실에서 삶의 조건은 때로는 분절된 장소만이 허락되기도 하고, 뿌리내릴 새 없이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길 위에 놓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고향에 대한 서사가 반복되는 건 많은 이들이 정서적 교감을 나눌 장소를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의 고향은 스산하고 남루하더라도, 자연의 숨결이 느껴지고 풍요로우며 인정스러운 장소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이 오늘날에도 상상의 고향을 마음에 품게 한다.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