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이후 도시 맥락의 변화
D
여의도 봉쇄
-0900경 진입
-모든 민간 출입 통제
-여의도 매복 점령, 진입은 언제 시키고 무장 정도와 복장은?
한겨레, 노상원 수첩… 서울서 ‘수거’ 뒤 ‘체포 전국화’ 계획 빼곡, 2월 14일 자
그날 계엄은 158분간이었다. 그로부터 70여 일이 지났지만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여파는 계속된다. 지난 14일 한겨레가 보도한 노상원 수첩 ‘D’ 데이 메모에는 '여의도 봉쇄' 구상이 있다. 새 소식이 들릴 때마다 어쩌면 계획이 실행됐을 그 장소가 달리 감각된다.
출근길 지나는 여의 2교는 국회의사당에서 가장 가까운 다리다. 다리를 건너며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봉쇄됐을 지점을 짐작해 본다. 여의도에 진입하려는 차량은 노들로로 우회시키고 샛강생태공원 쪽에 2차 저지선을 두었을지도 모른다. 장소에 대한 감각은 실제 경험한 특정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계엄이 해제된 뒤에도 '계엄의 도시' 여의도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된다.
이런 개인의 장소 경험이 도시 맥락에도 반영될까. 여의도에 대한 텍스트에서 맥락 변화를 보는 것은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한국언론재단의 빅카인즈는 국내 신문과 방송 기사를 데이터로 삼아 키워드에 대한 연관어 분석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사는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고 뉴스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에 기사를 기반으로 한 텍스트 분석은 의미 있는 변화를 파악하기에 유용하다. ‘여의도’와 연관성이 큰 단어들을 통해 여의도라는 장소가 어떤 맥락에서 언급되는지, 또 여의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2024년 12월을 분석하기에 앞서 2023년 12월 한 달간 전국 일간지, 방송사가 생산한 기사에서 ‘여의도’를 키워드로 연관어를 살펴봤다. 앞 글에서 상술한 것처럼 여의도는 계절별로 주기적인 일정이 있는 곳이어서, 변화를 비교하려면 전년 동월이 적절하다. 빅카인즈의 연관어 분석 알고리즘은 빈도보다는 키워드와의 상호작용에 가중치를 부여한 단어들을 보여준다.
2023년 12월 ‘여의도’와 가장 연관성이 큰 단어는 ‘위원장’이다. 2위인 ‘비상대책위원장’, 4위인 ‘한동훈 국민’, 6위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까지 연관어는 모두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는 소식에 엮인다. ‘여의도’의 연관어 상위 20개 중 18개가 정치 관련 단어다. ‘여의도’의 의미는 제도 정치다.
정치 관련이 아닌 ‘여의도’의 연관어는 15번째로 나온 ‘중소기업중앙회’다. 연말이라 경기 동향에 대한 분석, 인사 등 중기회발 기사가 많았다. 홍보성 동향 기사가 많은 경제지를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여의도가 국내 대표적인 금융가임을 고려하면 중기회가 나온 결과는 다소 의외다.
그밖에 16번째 연관어로 ‘재건축’이 등장했다. 이 시기 서울시의 여의도 아파트지구 지구단위계획안 수정 가결, 신속통합기획으로 추진되는 한양아파트의 재건축 정비계획, 지지부진한 다른 재건축 단지의 소식까지 기사가 쏟아졌다. 단순 빈도로는 ‘위원장’에 이어 ‘재건축’이 ‘여의도’에 두 번째로 자주 언급되는 단어였다. ‘여의도’의 또 다른 맥락은 부동산에 있다. 동여의도의 ‘재건축’과 서여의도의 정치 관련 단어들은 여의도의 이질적인 도시 구성을 반영한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은 ‘여의도’의 연관어를 모두 바꿔놓았다. 12월 한 달간 ‘여의도’와 가장 연관성이 큰 단어는 ‘윤석열 대통령’으로 나타났다. 이어진 단어들은 모두 윤 대통령과 대립하는 단어들이다. ‘시민들’은 ‘국회의사당역’과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비상계엄’에 반대하고 ‘탄핵 소추’를 요구했다. ‘무정차통과’는 인파의 규모를, ‘민주노총’은 집회 주최 측을, ‘선결제’는 집회 참여자들을 후원하는 새로운 집회 문화를 뜻한다. 모두 여의도가 계엄 시국의 진원지임을 보여준다.
‘여의도’의 상위 연관어로 ‘국회의사당역’이 등장한 것도 눈에 띈다. 계엄 이전 여의도가 제도 정치가 벌어지고 재건축을 계획하는 추상적 공간인 반면, 계엄 이후 여의도는 구체적인 현실 공간이 됐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단어는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국회의사당역’이다. 전자는 국회의원들의 활동 공간이고 후자는 시민들이 모인 공간이다. 혹시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이 음절이 중복되는 ‘국회의사당역’의 등장에도 영향을 준 게 아닐까? 내친김에 ‘국회의사당’은 어떤 맥락에 놓여있는지 살펴보자.
계엄 시국 ‘국회의사당’과 가장 연관된 단어는 놀랍게도 ‘시민들’이 나왔다. ‘사람들’, ‘국민들’도 비슷한 맥락의 연관어로 보인다.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려 한 ‘계엄군’,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보다 ‘국회의사당’과 연관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계엄을 해제하고 탄핵 소추안을 의결한 ‘국회의원들’은 다섯 번째였다.
계엄 해제 직후부터 국회는 각 상임위가 정부 부처에 대한 현안보고를 통해 진상 파악에 나섰다. 나흘 만에 본회의에 윤 대통령에 대한 첫 탄핵소추안을 상정하기도 했다. 국회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국회의원들이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국회의사당’을 언급한 기사들은 ‘시민들’을 더욱 주요 행위자로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을 뜻하는 대명사로 불리는 ‘여의도’와 ‘국회의사당’이 ‘시민들’의 장소로 여겨진 적이 있었던가. 국회를 ‘민의의 전당’, ‘대의민주주의의 상징’이라 말은 하지만, 주권자로서 시민이 여의도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시 맥락은 공간과 사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그곳의 독특한 지형이나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 최첨단의 인프라와 교통망 같은 물리적 환경이 기준이 될 수 있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정치, 경제, 산업, 문화 등 두드러진 활동이 그 장소의 성격을 규정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공동체가 폭넓게 공유하고 기억하는 장소 경험 또한 도시 맥락을 구성한다.
그런데 도시 맥락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의도(汝矣島)라는 이름은 우리말 ‘너섬’에서 왔다. 개발되기 전 여의도는 양이나 염소를 키우는 가치 없는 섬이었다. ‘너나 가져라’라는 얘기에서 '너의 섬', ‘너섬’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불과 79년 전 사진에서 여의도의 지금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변화하는 여러 구성 요소 중 무엇이 도시의 맥락을 결정할까. 공동체에 의미 있는 장소 경험은 도시의 정체성이 되고, 시간을 견디면 공동체의 상징 공간이 된다. 공동체가 중시하는 가치와 그것을 물리적 공간으로 확정하는 역학관계에 따라 그 도시의 맥락이 정해진다. 앞으로 여의도의 도시 맥락은 지난해 12월 이곳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대한 사법 판단과 역사적 평가를 통해 달라질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당신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여의도는 달라질 것이다.
* 상단 사진 2023년 여의도 ⓒ서울역사박물관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100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