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위한 도시 기록

by 구경하

# 건물의 장례식을 열자


동네의 풍경이 바뀌는 순간은 서늘하다. 자연스레 눈길이 닿았던 건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펜스 뒤로 숨어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 없이 사라진다. 마치 눈앞에서 무언가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던 마술 상자를 보는 듯하다. 건축가 겸 영상 제작자인 이윤석은 80년이 넘은 청파동 굴뚝 건물이 철거되는 과정을 우연히 목격하고 이를 기록했다.[1]


굴뚝이 철거되는 순간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지자, 그는 건물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그들에게 묘한 연대감을 느끼며 그 순간을 공동체적 경험으로 기억한다. “그 찰나의 순간이 시민들에게는 건축물에 대한 일종의 추모 의식”이었다고 말이다.[2]


이 경험을 거치면서 그는 건물을 철거할 때 “건축물의 장례식을 열자”고 제안했다. 장례식은 상실을 함께 받아들이고 슬픔을 표현하며 공동체가 소멸을 공식 인정하는 절차다. 준공 기념식을 여는 것처럼 건축물의 장례식을 열자는 건 “도시의 생로병사를 공적인 경험으로 만들자”는 취지다.


그의 제안에 공감하게 되는 건 낡은 도시와 이별하는 과정이 너무 매몰차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철거와 이주가 확정되면 동네에는 성마르게 ‘경축’ 현수막이 붙는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낄 틈도 없이, 개발 주체들은 그 감정을 ‘축하’할 일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일상의 희로애락이 쌓인 삶의 장소는 당장 떠나야 할 곳으로 평가절하된다.


“도시는 끊임없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만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도시는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는 장소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공동체가 이를 명예로운 죽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잠시 멈춰보자고 권한다. 건물, 나아가 장소 장례식은 결국 그곳에 깃들었던 우리의 삶을 존중하자는 제안일지도 모른다.



# 기록할 만한 장소는 어디인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은 더 있는 것 같다. 최근 진행 중인 힐튼 서울의 전시 후기에도 건축물 또는 도시의 장례식이라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힐튼 서울은 근현대 건축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민간 소유인 데다 수익성이 낮아 철거를 피하지 못했다. 현대사의 무대였던 독창적인 건물이라는 점에서 힐튼 서울은 에드워드 렐프가 설명한 ‘진정한 장소’에 해당한다. 그러니 그곳의 멸실은 공동체가 함께 기억할 만한 장소상실임이 분명하다. 이를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소멸에 맞서는 가장 오래된 방법 -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기념비적 건물이 아닌 평범한 생활공간, 대표적으로 아파트 단지는 기록할 가치가 있을까? 아파트는 상품 가치를 위해 대중의 가벼운 취향에 맞춰 대량 생산된 공간이다. 렐프는 이런 공간은 표준화되고 피상적인 경험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진정한 장소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파트 키즈는 이미 다양한 기록 활동을 벌이고 있다. 소셜미디어에는 사라진 아파트 단지 이름으로 운영되는 계정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에는 향수 어린 과거 사진부터 옛 주민 인터뷰, 단지 안의 나무와 생물들, 심지어 그곳에서 채집해 배양한 균의 사진까지 올라온다. 내가 자란 안양의 아파트 단지는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공식적으로 아카이브 작업이 이뤄지기도 했다.


다만 아파트 키즈의 기록 활동을 보다 보면 무력감이 들기도 한다. 수집한 이미지는 낭만적으로 재현한 고향에 불과하다. 물리적 장소는 이미 사라졌기에 이는 공간의 기록이라기보다 시간의 기록에 가깝다. 이런 집단 기억은 현재 도시 활동이나 관계망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체성의 기반이 되지도 못한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애틋한 자구책이지만, 소셜미디어가 제공하는 인터페이스는 장소성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결국 아파트 키즈의 고향은 소셜미디어에서 현존하는 장소와 뒤섞인 채 떠도는 비장소가 된다.



# 현재를 기록하는 이유


아파트 키즈의 기록에 한계가 있는 건 과거의 복원에 그칠 수밖에 없어서지, 주택 유형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도시의 삶은 어쩔 수 없이 규격 생산된 공간 안에 대부분 담긴다. 그런데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들꽃처럼, 그런 곳에도 장소애착이 자리 잡기도 한다. 어디서든 자신만의 진정한 장소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런 생활세계에 주목한 도시 기록 활동이 활발하다. 특히 삶이 현재진행형인 장소의 기록은 변화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


부산 영도구 동삼 2 주공아파트 전경과 전시된 주민 참여 작품들.


“나는 이방인인가.” 부산에서 열린 청년 마을 기록가 전시에서 호연 작가는 이렇게 글을 열었다.[3] 사람이 떠나는 장소에서는 머물러 있는 사람도 이방인이 된다. 그는 부산 원도심 토박이인데도, 기록 대상지인 영도 상리마을에 낯선 이질감을 느낀다. 연결이 단절된 도시에선 누구나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상리마을은 인터넷 지도에도 위치가 나오지 않는 옛 지명이다. 행정상 주소는 동삼 2 주공아파트, 영구임대 아파트 단지다.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그는 비로소 지역의 과거와 계속 살아온 이들을 알게 되고, 이웃 동네를 생생한 삶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된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주민들이 집에서 가장 애정하는 공간을 그린 ‘나의 집’ 연작이 눈에 띄었다. 13평형, 같은 구조의 집이지만 어느 하나 같은 그림은 없었다.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구도에서부터 가구 배치, 벽면 장식까지 사는 사람의 취향과 삶의 방식에 따라 달리 꾸민 모습이었다. 비슷한 배경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머무는 임대아파트일지라도 삶의 경험은 규격화되지 않는다.


관람하는 동안 전시장에는 청년 기록가들이 다음 활동을 위해 토론하는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대아파트에 대한 기록 활동은 소외된 주민들의 삶을 지역 사회와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전달자가 된 청년들이 지역에 애착을 가질 계기가 된 것 같았다. 기록 활동을 통해 임대아파트는 서로 다른 세대가 소통하고 지역의 집단 기억을 만드는 플랫폼이 되고 있었다.


제너럴모터스 인천 부평 2 공장에서 열린 <모터타임즈> 전시


산업공간의 기록인 <모터타임즈>는 인천에 있는 한국 GM 부평 2 공장에서 열린 현장전시다.[4] 전시는 2022년 가동이 중단된 공장에서 열렸지만, 바로 옆동에선 수출용 자동차를 계속 생산 중이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노동조합이 아카이빙 사업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이례적이다. 이 공장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개획의 일환으로 새나라자동차를 설립해 국내 최초로 승용차를 조립 생산한 곳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에서 역사성과 상징성이 큰 공장이 멈춰서자, 노조가 산업유산이 소실되어서는 안 된다며 기록 작업을 주도했다.


1년에 걸쳐 준비한 기록과 전시물들도 인상 깊었지만, 불 꺼진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를 걷는 관람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장소감을 느끼게 했다. 컨베이어에 맞춰 적응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육체와 시간, 시대 요구에 맞춰 숙련한 기술에 대한 자부심, 대량 생산 체제가 요구하는 규율 등이 온몸에 전해졌다. 기록 활동이 혹여 공장의 영구 폐쇄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일부 조합원의 우려에도, 노조가 전시를 통해 시민을 공장으로 초대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문화활동을 명분으로 공장의 불을 다시 켜고, 노동자들이 일궈온 노동과 기술, 지역 사회에서의 가치를 알리게 위해서였다. 나아가 이들의 최종 목표는 자동차 산업의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한국 GM을 새롭게 브랜딩해 회사의 지속성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강경투쟁 이미지인 금속노조 소속이지만, ‘부지매각 반대’의 메시지는 투쟁 천막의 존재를 통해 관람객에게 간접적으로 전했을 뿐이다.



# 변화를 위한 도시 기록


도시 기록은 장소상실과 망각에 맞서는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최근에는 그 목적과 주체가 다양해지고 있다. 기록 활동은 같은 도시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지역에 대한 관심사를 나누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아가 공동의 경험을 만들어 미래의 정체성을 함께 그려갈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지원하는 다양한 도시 기록 활동이 늘고 있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지자체의 문화 부서가 기록 활동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도시 정비 부서가 지역의 역사 문화 자원을 고려하지 않정비 계획을 추진하는 상황은 늘 안타깝다. 과거의 복원과 현재의 기록을 넘어 미래 계획으로 이어질 도시 기록 활동을 기대해 본다.




[1] 이윤석, <건축의 장면-39일간의 철거기록: 청파동 굴뚝건물>,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2025.

[2] 이윤석, 「건축물의 장례식을 열어라」, YOHIM, 용산역사박물관, 2025 여름호.

[3] 호연, 「상리, 우리가 느낀」, <단지, 감각한 기록 전> 인터뷰집, 부산 상리종합사회복지관, 2025

[4] 경인콜렉티브, <MOTOR TIMES>, 한국 GM 부평 2 공장, 2025

*상단사진 - 조건, <단지, 감각한 기록 전>, 부산 상리종합사회복지관, 2025.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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