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슬픔

아파트 키즈의 장소 상실

by 구경하

언어화 이전의 감정


언니가 몰티즈 강아지를 집에 데려왔다. 하얀 솜뭉치 같은 녀석은 보드랍고 따뜻하고 꽤 묵직했다. 녀석은 발랄하고 쾌활한 성격에 사람을 좋아했다. 문 밖에서 나는 발소리만 들어도 가족의 귀가를 알아챘고, TV에서 내 목소리가 나오면 뉴스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떠난 빈자리를 녀석은 경쾌한 뜀박질로 메웠다. 그러다 녀석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언니는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녀석은 신장병을 앓다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강아지별로 떠났다.


언니는 한동안 깊은 상실감과 우울에 시달렸다. 이른바 펫 로스(pet loss), 인간보다 수명이 짧은 다른 종의 동물과 살아가면 피할 수 없는 슬픈 경험이다. 그런데 언니를 더 힘들게 한 건, 그 슬픔을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녀석은 언니에게 가족이나 다름없었지만, 인간 가족이 아니기에 가족상을 당한 것처럼 회사에 휴가를 낼 수는 없었다. 마음이 힘들어도 일상을 이어가야 했고 직장에서 계속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반려동물 인구가 늘었다지만, 당시는 반려동물을 잃은 슬픔까지 주위에서 배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감정을 ‘반려동물 상실 증후군’이라는 표현으로 국립국어원이 정리한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슬픔’이 없는 나라


감정은 흔히 개인 차원의 경험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떤 심리학자들은 감정도 사회적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사회가 그 감정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그 감정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타히티에는 슬픔을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그곳 사람들 역시 슬픈 경험을 하겠지만, 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문화에선 슬픔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언어화되지 못한 감정은 현실의 문제로 나타났다. 타히티는 천혜의 자연환경인데도 자살률이 높았다. 인류학자 로버트 레비는 그 원인을 타히티에 슬픔을 뜻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슬픔의 표현이 억눌리는 집단에서는 개인이 정신적 고통을 해소하지 못해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 감정의 언어화 여부는 그 감정의 사회적 수용 정도를 보여준다.



아파트 키즈의 장소 상실


아파트 키즈의 감정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장소 상실(placelessness)'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감정이라는 생각이 었다. 도시계획을 전공하며 이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내 모호한 감정에 드디어 이름을 찾았다고 느꼈다. 장소 상실은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가 제안한 개념으로, 오랜 시간 일상생활을 하면서 애착을 형성하고 정체성의 기반이 된 장소가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진정성 있는 장소가 무미건조하고 동질적인 공간으로 대체된다는 점에서 '무장소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장소 상실은 공간의 소멸과 그 장소와의 유대감 단절이라는 두 차원에서 진행된다.


장소 상실이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사라지는 장소에 대해 서운해하면서도 그 감정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아파트 키즈라고 해서 모두 아파트 단지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는 나와 성장기를 함께 보냈지만, 나처럼 아파트에 장소 애착은 없었다. 언니에게 옛집의 재건축은 물리적 공간 차원의 변화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아파트 단지의 재건축은 감정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 감정은 공간의 소유 여부나 권리와도 무관했다. 그 집은 아버지 명의의 자가였고, 우리 가족이 그곳을 떠난 것은 자발적인 이주였다.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를 애틋하게 기록한 다른 아파트 키즈 중에는 그곳에 재입주할 예정인 경우도 있었다. 강제로 떠밀린 것도 아닌데, 심지어 다시 돌아올 예정인데 왜 우리-일부 아파트 키즈는 상실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언어화하지 못했고, 장소 상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낸 적도 거의 없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아파트 키즈가 장소 상실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설적이게도 한국 사회가 맹렬하게 장소 상실이 진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빨리 아파트 단지로 신도시를 만들고 또 재건축해서, 주택의 수명이 짧다. 기술적으로는 장수명 주택이 가능해졌지만 주택 시장에서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장소의 소멸에 대해 비판적인 개념인 장소 상실을 말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감상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다.


노후 아파트의 상태도 소 상실에 대한 표현을 주저하게 하는 현실적인 이유다. 한국의 아파트는 대개 내부 설비의 교체가 어려운 벽식 구조다. 준공한 지 30년쯤 되면 녹물이나 누수 같은 문제나 주차장 부족 등의 불편함이 생긴다. 소유주가 기능을 다 한 자기 집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단 그곳을 떠난 아파트 키즈는 옛집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 현재 소유자들의 의사결정을 존중하다 보면 옛집을 언급하는 건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진다. 또한 규격화된 낡은 콘크리트 더미에 대한 애착은 세련된 미감도 아니어서 공감받기가 어렵다.


더욱이 아파트 단지에 대한 애착은 특정 시기, 일부 세대의 특수한 경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30년 이상된 노후 건축물이 늘면서, 낡은 아파트 단지에서 불만족스러운 주거 경험을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대량 공급된 파트 단지에서 운 좋게 유년기를 보낸 X세대 중산층 일부만이 아파트 단지를 양질의 주거 환경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가 재건축이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이제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 성장기를 보내는 건 소수의 특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주택의 사용가치보다 자산가치가 중시되는 분위기에서 건축은 자본에게 선택받은 지역이라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024년 서울시 30년 이상 노후 건축물 현황 (출처-서울연구데이터베이스)


나아가 공간을 자본 축적의 한 수단으로 삼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 세계적으로 공간의 생산과 소비는 끝없이 장려된다. 시장 주체로서 개인에게 이동은 내면화하고 체화해야 할 태도로 권장되며, 장소 애착은 성가시고 고루한 정서로 여겨진다.


체제의 차원이 아니라도, 인간은 누군가의 장소를 허물고 그 위에서 다시 자신만의 장소를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장소 상실을 감상으로 접근하는 건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한꺼번에 하다 보면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내 마음은 오락가락 그네를 탄다.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애착의 장소는 30년마다 멸실되는 사회에서, 아파트 키즈는 거대한 실향민 집단이 된다. 어쩌면 이들은 슬픔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현실을 살아간다.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