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는 길

아버지와의 거리

by 구경하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면 세 시간 남짓 걸린다. 새마을호를 5시간쯤 타고 갔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시간거리가 많이 단축됐다. 그런데 거리에 대한 감각은 교통수단으로만 결정되는 건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사건들은 익숙한 거리감을 뒤흔들어 놓는다.


코로나19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바이러스는 가까운 관계를 타고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거리 두기가 사회 규범이 됐고, 매일 재난방송에서 새로운 방역수칙을 전파하는 게 내 일이었다. ‘5인 이상 집합금지’라는 초유의 방역수칙이 시행될 때는 그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역학조사관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의대 교수인 그는 “믿는 관계일수록 위험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기사의 제목을 그 말에서 가져왔다. “가족·집·친구가 더 위험…나도 확진자인 듯 행동하세요!”라고.


역학조사관은 한 장소에 여럿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친밀한 관계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무증상 감염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바이러스를 옮기게 될까 봐 지방에 사는 부모님과는 11개월째 만나지 못했다고도 했다. 당시에 나는 일하면서 여러 번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자가격리를 경험한 상태였다. 그 얘기를 듣고서 대면 접촉보다는 전화 같은 비대면 통신수단으로 자주 연락하는 게 노인이 된 아버지를 배려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내가 바이러스에 노출돼 만나는 사람들을 전염시킬 리스크가 컸다. 나는 일부러 아버지가 계신 부산에 가지 않았다.


만나는 간격을 벌린 데 더해 움직이는 속도까지 느려지면 거리감은 더욱 커진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날 무렵, 나는 다리가 점점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특발성이라고 했다. 왜 아픈지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수술을 제외한 모든 보존적 치료를 했지만 증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회사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 가다가도 두 번을 멈춰 설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을 때 결국 병가를 냈다. 다리를 완전히 쉬게 하자며 의사는 깁스를 처방했고, 그동안은 집 앞 공원도 가지 못했다. 부산은 아득하게 먼 곳이 되어버렸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랬다. 그 무렵 아버지도 아프기 시작했다. 부산에 있는 친척이 아버지를 종합병원에 모시고 갔다. 의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진료 상담을 녹음해서 받았는데, 의사는 아주 초기의 파킨슨 병이라고 했다.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급성기 질환은 아니지만, 삶의 질이 떨어지는 퇴행성 질환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 나는 또 다른 질환으로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중년의 딸은 서울에, 노년의 아버지는 부산에 떨어져 지낸 채 각자 치병을 했다.


그 와중에도 몸을 추슬러 아버지의 외래 진료에 동행한 적이 있다. 아버지 집에서 병원까지는 약 3km 거리였다. 파킨슨 환자인 아버지에겐 걷기가 재활운동이었지만 다리 환자인 딸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길이었다. 웃픈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병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나보다 앞장서서 잘 걸어가셨다. 그 모습에 나는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만난 주치의는 부 산에서 보기 드문 빅 5 출신에, 친절한 전문의였다. 아버지의 정밀검사를 위해 대학병원 진료 의뢰를 요청했다. 마침 그 분야에서 권위 있는 대학병원이 지역에 있었다. 몇 달 뒤 받은 정밀검사 결과는 초기에 받은 진단명과 동일했다.


하지만 2년이 안 돼 아버지는 병원에 걸어갈 수 없게 됐다. 주치의는 진단명을 변경했다. 일반적인 파킨슨 병이 아니라 비정형 파킨슨인 다계통위축증(Multiple system atrophy, MSA)이라고 했다. 10만 명당 0.7명꼴로 보고되는 희소 질환으로, 발병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고 치료제도 아직 없다. 초기 증상은 파킨슨 병과 비슷하지만 진행이 빠르고, 운동실조와 자율신경계 장애, 리고 구음장애가 진행돼 언어 능력을 잃게 된다. 영상검사를 해도 감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증상 진행을 보고 뒤늦게 진단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그런 경우였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은 이동성을 잃는다. MSA 환자는 그 속도가 빨라 증상 발현 후 3년이면 독립 보행이 어려워진다. 고령에 발병한 아버지는 이보다 병의 진행 속도가 더 빨랐다. 여기에 치매 진단까지 더해지며 배회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부산에 내려갔다. 눈으로 본 아버지는 당장 치매보다는 기침이 심했고 발음이 무너져 있었다. 이제 아버지와 병원에 가려면 차와 휠체어가 필요했다. 입원 수속을 밟으면서 아버지 코로나19 감이 확인됐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몸은 폐렴으로, 심장 이상으로, 인공영양 시술로 연달아 쇠약해졌다.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고 나서 나는 고열로 앓아누웠다. 아버지에게 전염된, 나의 첫 코로나19 감염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삶과 죽음 사이, 회색지대에 있다. 주치의는 아버지가 여명을 예상할 수 없는 상태라며 이미 ‘나쁜 소식 전하기’를 했다. 검사 후 고액의 심장 시술을 권했던 심장 내과 의사는 병실의 아버지를 늦게 직접 보고 서 "시술은 삶의 질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제안을 거두어들였다. 폐렴 치료 뒤 의사의 권유로 입원한 요양병원은 수속 도중 연명치료 의향을 가족들에게 확인했다. 지인인 의사는 이른바 연명 셔틀이 시작된 거라고 내게 직설적으로 설명해 줬다.


의료인들은 마지막이라 메시지를 우회적인 표현으로 일관되게 보냈지만, 가족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입원하기 불과 석 달 전에도 우리는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집에 모여 다 함께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불어 껐고, 미역국을 대접에 한 사발로 드셨다. 병세가 계단식으로 급격하게 악화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닥쳐보니 그 계단은 낭떠러지만큼 깊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려봤다. 요양병원은 하루에 1시간 반의 면회시간만을 허용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부산에 간다. 서울에서 기차로 3시간, 부산역에서 병원까지 이동하는 거리와 셔틀버스 대기 시간까지 더하면 편도 5시간이 걸린다. 병상의 아버지와 대화도, 필담도 불가능한 상태라는 걸 아는 지인들은 2년 반 이어지는 나의 부산행을 의아해한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내려가기에 치매 아버지와의 면회가 비효율적인 게 아니냐는 거다.

하지만 치매 환자가 됐어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내가 병실에 들어서면 딸을 알아보고 반기신다. 가벼운 고갯짓을 하거나 손을 잡아끌고 눈을 맞추신다. 이때만큼은 파킨슨 환자 특유의 경직된 얼굴에도 살짝 곡선이 그려진다. 평소 과묵했던 아버지는 질병으로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면서 오히려 애정 표현이 늘으셨다. 딸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부산에 내려오라는 얘기를 먼저 하신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손을 붙잡으면 좀처럼 놓아주지 않으신다. 그러다가도 복시 증상으로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벽시계를 집중해서 보고 내가 기차를 타러 가야 할 시간이 되면 그만 가보라고 몸짓으로 알려주신다. 매일 재활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성실함도 아프기 전과 다름 없는 아버지의 성격이다.

면회를 가면 나는 아버지께 가벼운 근황을 얘기하거나 찬송가를 함께 들으며 굳은 근육을 풀어드린다. 다리를 치료하느라 물리치료사와 4년 넘게 재활운동을 해서 나는 근육 이완을 제법 잘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을 대신해 주는 통신수단으로는 이제 아버지와 소통할 수 없게 되었지만, 직접 만나 손끝으로 전하는 무언의 대화는 아직 가능하다. 같은 장소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나는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있다고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얘기한다. 그 온기가 고독한 고통 속에 있는 아버지께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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