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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삶공부 Aug 20. 2021

왜 나는 쓰는가?

"삶과 글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잘 쓰려면 잘 살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글을 쓰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다. 누구 한 사람도 나의 글을 검사 맡아주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오늘도 난 글 쓰는 이 일을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열심히 때로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하고 있다. 스스로 자발적 수고를 선택한 것이다.



단기간의 수고를 감당하고 그만두는 것도 아니다.

나의 글쓰기 경력은 제법 오래되었다. 처음에는 학부모님과 소통하기 위하여, 알림장 쓰고 그 밑에 이어서 다섯 문장 안팎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이 소통의 역할을 해 주리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알림장 이름까지 ‘징검다리’라고 지었다. 학생과 학부모님 사이를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었다. 공부만 가르치는 우리 반 아이들의 담임교사로 살아가는 게 내 마음이 덜 찼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소통이 될 때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 글에 학부모님들이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댓글을 남겨주고 나의 글을 기다려 주었다.  몇 문장의 글인데도 글이 안 올라오는 날은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해 주었다. 나도 몇 줄 안 되는 글을 완성하느라 새벽 30분 이상씩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가 5년 이상을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새벽 한 시간 30분 이상씩의 글쓰기를 매일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 학교종이 앱에 매일 써서 발행하고 있다. 물론 학부모님과 소통하는 글쓰기다. 글쓰기 시간이 늘어난 만큼 소통의 정도도 찐해졌다. 물론 더 행복해졌다.






나는 왜 이 자발적 수고를 갈수록 더 강도를 높여 감당하고 있는가? 


왜 나는 글을 쓰는가?


소통하고 싶어서였다. 


단 몇 문장이라도 글은 마음이다. 

마음이 담긴 글을 상대에게 전하면 글이 소통의 도구로 변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을 나누겠다는 의미다. 내가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대상은 우리 반 아이들의 엄마 아빠들이었다. 아이들은 직접 만나서 소통하고 있지만 이 아이들과 소통하며 지내는 부모님들을 직접 만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이런 바람이 글을 쓰겠다는 행동으로 실천이 되었고 글을 쓸수록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소통의 맛을 점 점 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소통하기 전보다는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더욱 그랬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정이 들어갈수록 아이들의 부모님들과도 소통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소통하기 위해서


글을 쓰면서 알아차린 게 있다. 

글은 그냥 써지는 일은 아니었다. 어떨 때 글이 잘 써지는지는 어렴풋이 감이 오기 시작했다. 글이 소통의 도구라고 이미 말했다. 글을 통해 소통하려는 대상이 있다. 그 대상과 소통을 잘하기 위한 준비운동이 되어 있으면 글을 쓸 때 훨씬 더 잘 써진다는 사실이었다. 

그 준비운동이 나와 소통하는 일이었다. 



나와 소통이 잘 될 때 내가 소통하려는 대상과는 자연스럽게 소통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나와 소통하는 일에 더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물론 소통하려는 대상과 글로 소통하는 것도 나와 소통하는 한 부분인 것도 맞다. 우리 반 어머님들과 매일 새벽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는 일이 나랑 소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새벽 그 시간에 좋은 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나랑 소통하는 나머지 시간이 더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삶과 글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잘 쓰려면 잘 살아야 한다.


강원국 님의 이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나랑 소통을 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랑 소통을 잘하면서 산다는 의미는 나랑 친하게 살아간다는 의미다. 친한 사람끼리는 자주 만나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려고 온 힘을 쏟고 어떻게든 해결하면서 더 친해지고 이러는 게 친한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 글쓰기다. 잘 살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잘 쓰기 위해서 잘 사는 것이다.





왜 평생 쓰고 싶은가?


나랑 소통하기=나랑 친해지기=그 결과물이 글

잘 사는 삶= 잘 쓴 글


이런 공식이라면 나는 평생 글 쓰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었다. 진짜 욕심나는 일이었다.

글을 잘 쓰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잘 살아가고 있는지 노력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욕심나는 이 일을 평생 하고 싶어서 아예 작가가 되어 버렸다. 3권의 책이 나왔고 학부모님과 소통하는 범위를 넘어서서 독자와 소통하는 경험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평생 글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겠다는 말은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어떤지 세상 사람들에게 평생 검사 맡겠다는 당당한 선언이다. 독자가 매겨주는 점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다. 스스로 지는 십자가다. 독자를 위해서 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를 살리는 십자가이기에 기꺼이 질 수 있다. 나를 위해 짊어진 십자가로 독자들까지 살려내는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책의 힘이다. 이런 과정이 글쓰기이고 작가로 살아가는 삶이다.





왜 브런치 작가로 살고 싶은가?


네 번째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고 지금 진행되고 있다.

브런치 작가로 살아가겠다는 마음도 먹게 되었다. 작가 등록을 해 두고 기다리는 시점이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내 삶을 검사해 주는 사람을 더 많이 확보하고 싶어서였다. 이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미 이런 삶을 선택했거나 이런 삶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다. 검사해주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잘 살아야 한다. 좋은 점수를 받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삶의 과정들을 온 정성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는 나와 새끼손가락 건 굳은 약속이다. 이 선한 약속을 평생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브런치이다. 브런치 작가로 살아가는 길이다. 


더해서 이익은

내가 채점자도 될 수 있다. 브런치 작가가 되면 다른 작가님들의 글도 언제든지 볼 수 있다. 글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들여도 보는 일이다. 채점자로 점수를 매긴 것뿐인데 그 사람의 삶에서 베껴 쓰고 줄 긋고 그런 일들이 갈수록 더 많이 생길 것이라 예상된다.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을 위한 응원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응원하는 일이었는데 내가 더 응원을 받는 일이 되는 것이다. 서로의 삶에 감독자도 되어주고 응원자도 되어주는 공간, 그게 브러치라고 생각한다. 브런치 작가로 살아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9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모습이 월스트리트 저널의 원고를 쓰면서 펜을 한 손에 쥔 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경영의 신, 피터 드러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삶의 마지막까지를 완전히 승화한 모습! 숭고함 그 자체다!  









나도 이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마지막 모습도 이랬으면 정말 좋겠다. 글 쓰는 삶, 작가로 살아가는 삶에 욕심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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