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독서모임 Book두칠성 2기의 두 번째 선정 도서는 유선경 작가의 『어른의 어휘력』이었다. 독서모임을 통한 책 읽기의 묘미는 혼자라면 나의 주관에 의해서만 고르고 읽었을 책 이외의 책들을 어떻게든 읽어야 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 우연한 만남이 좋으면 좋은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혼자 읽는 독서와는 다른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이 책 또한 다른 멤버의 추천에 의해 선정된 것이라 저자와 목차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 읽게 된 케이스였다. 이왕 읽는 거 조금 재밌게 읽어보자는 생각에 평소와는 달리 조금 색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는데, 바로 읽기 전의 첫인상과 읽고 난 후의 감상을 「Before & After로 비교해 보기」로 한 것! 책 한 권이 나를 통과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는 일종의 실험이라고 할까.
방법은 이렇다.
1. 책을 읽기 전, 목차를 보고 흥미를 끄는 챕터를 노란색 형광펜으로 표시 해 둔다.
2. 책을 다 읽고 난 후, 도움이 되었거나 기억에 남았던 챕터를 파란색 형광펜으로 표시한다.
3. 「Before & After」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본다.
먼저 책을 읽기 전, 목차만 보고 흥미로운 부분에 줄을 그어 보았다.
제목에서 본문 내용이 연상되는 것들에 먼저 손이 갔다. 예를 들어 [1-05장: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에서는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맥락의 내용이 예상되었고, [2-06장: 독심술 보단 말의 힘을 믿어라]에선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대화와 글이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해선 나와 상대가 암묵적 합의를 이룬 맞춤 어휘를 사용하는 것으로 오해를 덜고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상상해보았다.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결을 같이 하는 제목에도 눈길이 갔다. [3-04장: 생각이 충만한 게 먼저다]는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100% 공감하는 부분이었기에 분명 ‘맞아 맞아! 그래 이거!’하는 내용이 들어있겠구나 싶어 얼른 읽어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목차를 둘러보면서 앞으로 읽어나갈 책이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 밑그림을 그려 놓으니 첫 만남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마치 처음부터 내 손으로 고른 책이었던 것 마냥 없던 애정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낱말이 떠오르지 않는 걸 두고 사람들이 자꾸 나이 들어 생긴 건망증이라고 하는데 저는 건망증이 아니라 어휘력 부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휘력은 말발 센 게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휘를 마음대로 부리어 쓸 수 있는 능력’이라고 풀이하는데 그러려면 낱말을 양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하긴 해도 낱말에 대해 ‘잘’ 알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어휘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힘이자 대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이러한 힘과 시작을 기르는 것이다. … 이 책의 제목을 『어른의 어휘력』으로 삼은 배경이다.
_『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 (2020)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외국어(일본어)를 배우면서 자연스레 국어 공부가 (더) 많이 됐다. 몰라도 눈치껏 알아듣는 모국어와 달리 외국어를 습득하기 위해선 사전을 들춰 볼 일이 많아지고,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한국어 어휘를 많이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외국 친구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 비슷하지만 다른 모양의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단어와 단어 사잇길에 있는 그 미묘하고도 꼭 맞는 표현을 찾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는데, 이 훈련을 통해 구사하는 단어의 수가 늘어나고 각각의 어휘에 담긴 뉘앙스를 예민하게 다루는 스킬이 높아지는 경험을 했다.
반면 어휘력이 부족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딱 맞는 어휘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억 날 듯 말 듯, 개미 한 마리가 뇌의 언어중추 언저리를 슬슬 기어 다니며 간질이는 거 같더니… 아는데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면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휘력은 개념이다. … 그것이 어떤 필요로 등장했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학습하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어휘력이 부족하면 말이나 글에 지체구간이 생기고 늘어진다. 표현하고 싶은 용어나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것을 설명하느라 정작 하려던 말이나 글을 중단하고 곁가지 서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말이나 글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이미 용어나 낱말을 아는 사람에게는 쓸데없고 지루하다.
_ 『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 (2020)
그렇다면 어휘력 = 낱말을 많이 아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직 6살이 채 안된 우리 아이는 어휘력으로 치면 엄마인 나와는 분명 쨉이 안될 텐데도 ‘어쩜 이런 생각을 했지?’ 하고 어른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일테면 아이가 4살일 때 ‘발란스(バランス, Balance)’라는 말을 사용하길래 알고나 하는 소린가 싶어 ‘발란스가 뭔데~?’하고 물으니 엄마는 참,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리고 조심조심 걷는 거야. 병아리가 앉은 것처럼, 천천히 … 이렇게 …’하며 두 팔을 양 옆으로 뻗고는 조심스레 걷는 시늉을 했다. 어느 날은 동화책을 읽다가 ‘참는다’는 뜻의 일본어 [我慢(がまん)]이라는 한자어가 나와서 ‘이게 무슨 뜻일까?’라고 물으니 골똘히 생각하다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지만, 다음 크리스마스에 받기 위해서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 쓰는 거!’라고 대답해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많은 개수의 낱말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알고 있는 낱말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글쓰기가 업(業)인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해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정확한 어휘와 표현을 찾는 것이 목표다. 이룰 수 없는 목표를 바라보고 하염없이 헤맨다. 뜻이 통하면 됐지 구태여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 있느냐 묻는다면, 이 과정에서 겪은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바로, 찾아 헤매는 동안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점점 더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생각만 어휘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어휘도 생각을 찾아와 중간 어디쯤에서 극적으로 만나 부둥켜안는 것 같다. 분명 내 자아에 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
_『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2020)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특히 이 점을 많이 느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오직 글로만 내 생각을 올곧이 전달하기 위해 쓰고 있는 문장에 더함도 덜함도 없이 야무지게 들어맞는 낱말을 찾았을 때의 희열. 그리고 그걸 알아봐 주는 이를 만났을 때의 쾌감이란! 작가의 말의 크게 공감하면서 이 부분에서 책을 탁! 덮었다.
하아 … 이제 나올 건 다 나왔다.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나만 알고, 나만 느끼는 건 줄 알았는데. 세상에 무림 고수들이 이렇게나 많다. 구태여 왜 글은 쓰겠다고 해가지고. 내가 할 일이라곤 고작 그들의 말을 길어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작은따옴표(인용 부호) 안에 고이 모셔두고 바라보면 될 뿐 … 내 생각은 일기장에나 쓰면 되지 ….
그렇게 침울해하고 있는 나에게 작가는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었다.
빌려온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눈으로 대상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신비와 환희에 가득 찬 기쁨을 맛보며 오롯이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동시에 깨달을 것이다. 자신의 어휘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 아름답다, 놀랍다, 멋지다, 좋다 등 알고 있는 찬탄의 어휘를 모조리 동원해도 입 안이 빈 동굴처럼 허전하다. 그리하여 압도적인 풍경 앞에 선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마는 것처럼 기껏 이런 말밖에 못 하는 것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지상 최고의 찬탄인 양…….
그런데 솔직히 말해보자. 그 이상의 언어를 활용하길 회피한 건 아닌지. 그를 위해 꼼꼼히 관찰하고 질감 있게 느끼며 깊이 있게 생각하기를 포기한 건 아닌지. 오해 마시라. 당신 멱살 잡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그럴 때가 많아하는 소리다.
_『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2020)
찔끔 나오려던 눈물을 훔치고 다시 용기를 얻는다.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하고, 멋진 말을 한 저 이의 말만 따르자고 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곳일까. 투박하고 못생겼어도 내 안에서 건져 올린 나의 감정은 나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
나 또한 경계한다. 어설프게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 문장들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온몸을 통과하지 않은 설익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냈을 때의 무게감은 한 없이 가볍다. 반면 온몸으로 겪어낸 이야기는 단 한 줄을 써도 표현이 풍부하고 묵직하다.
얼마 전, 쓰고 있던 글이 날아가버린 속상한 사건이 있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이런 무게감이 없어 훨훨 날아가버린 것이 아닌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건 별로야, 이건 좋았어하고 이분법적으로 나눔 하던 감정을 쪼개고 쪼개 본다. 어디가 좋았나, 어떻게 좋았나. 지금 이 독서노트를 적으면서도 뾰족한 연필심(芯)을 깎듯 생각의 심을 예민하게 깎아내어 본다.
또 하나, 말과 글은 소통을 하기 위한 것이지 다름없다. 설령 그 청자가 ‘나 자신’이라 할 지라도, 내 안의 생각과 느낌을 꺼내어 말과 글로 전달하는 수고를 들이는 이유는 서로의 다름을 알면서도 이해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얀 마텔의 소설 《베아트리스와 버질》에서 버질이 베아트리스에게 배를 설명하는 희곡이 등장한다. … 버질은 베아트리스가 알고 있는 것에 기대어 한참 설명했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을 끝내 알릴 수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버질의 이야기에 푹 빠져 머릿속에 온갖 형상을 열심히 그려 봤지만 최종적으로 몰랐다. 언어의 한계다. 상상의 한계다. 인식의 한계다.
흔하디 흔한 과일 하나 설명하기도 이렇게나 힘든데 나는 알고 당신은 모르고, 나는 겪고 당신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라면 오죽할까. 그래서 대화가 각자 말을 하거나, 그저 그런 진부한 언어의 나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_『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2020)
일본에 살면서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 어느 날 갑자기 생뚱맞게 등장한 한국인 며느리 때문에 시부모님은 한국의 결혼식이 어떤 건지, 두 시간 남짓한 시간에 이삼백 명 하는 인원이 후다닥 식을 올리고 밥을 먹고 나가는데 체하는 사람은 없는지 걱정도 물음도 많으셨다. 손짓 발짓 동원해 설명해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 전해지지 않는다. 결국 결혼식 당일까지 내가 하는 말의 반의 반도 못 알아들으신 시어머니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한국의 결혼식을 제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아, 이런 거구나’ 하셨더랬다.
10년 넘게 같이 살아온 남편은 또 어떤가. 한참을 이야기하고 설득하여 내 맘이 네 맘이고 네 맘이 내 맘이겠거니 했는데 각자의 마음 밭이 딴 데 가 있으니 같은 말을 심어도 엉뚱한 싹이 튀어나와 엥? 하고 황당했던 기억이 어찌나 많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른 우리가 언젠가, 어느 지점에선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뿐이다. 대화밖에 없다. 다르지만 마주 보려는 노력. 그것을 하는가 아닌가 가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나만 겪은 일을 당신에게 알리고, 당신이 겪은 일을 내가 알 길은 언어밖에 없다. 언어는 강철보다 견고한 인간의 마음을 두드려 금 가게 하고, 틈이 생기게 하고, 마침내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말과 글은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증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낙인찍으면 말과 글은 효용을 잃는다. 말과 글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숨이며 희망이다. 현실이 초토화되었어도 글을 짓고 말을 할 수 있다면 희망과 믿음을 버리기에 아직 이르다.
_『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2020)
요란하게 부부싸움을 하고 제 풀에 지쳐 ’ 포기’라는 단어를 쉽게 입에 올렸던 나를 반성한다. 아직 함께할 날이 더 많은 우리다. 다 이해시키고 이해받자는 욕심을 내려두고 마주 보겠다는 마음, 그거 하나 만 남겨 두자. 했던 말 또 하고, 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원점에서 시작하더라도 마주 보고 마주함으로써 언젠가 버질이 베아트리스에게 설명하고자 했던 그 ‘배’가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그래! 그때 내가 말했던 그게 이거야!’할 수 있는 기쁨도 맞이할 수 있다.
요령도 필요하다.
신혼 초, 나는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암만 날고 기어봐야 네이티브 스피커인 일본인 남편을 말발로 이길 수가 없었기에. 내가 말이 딸리지 생각이 딸리는 줄 알아! 싶었지만 그 말 또한 저 이가 알아듣는 말로 했야 했으니. 이 한국말도 못 알아먹는 멍충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공염불이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글을 썼다. 내 마음 추스르자는 의미도 있었고, 그에게도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단어와 문장 사이에 생각의 시간을 덧입혀 편지를 썼다. 다음 날 아침, 우느라 편지 쓰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읽어 봐’하는 나에게 남편은 정성이 갸륵해서인지 편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해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듣는 귀를 열어 주었다.
울고 싶지만 울지 않고, 꿀밤 때리고 싶지만 때리지 않고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감정을 품위 있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표시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파악하고 최종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퀴 지을 지성을 갖췄다는 뜻이다.
어른이라고 울 일 없으랴. 목 놓아 펑펑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저마다 가슴 열어젖히면 눈물이 그득히 쏟아져 온 땅이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그뿐, 눈물은 나를 변화시키지도 상황을 바꾸지도 못한다. 말 안 하면 왜 우는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울지 마라, 소리 내 말하라, 글을 쓰라.
그래야 내가 변할 수 있고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내 속을 풀어내는 것도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설령 말 때문에 사달 날 위험이 크다 해도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
_『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2020)
참고로, 외국어를 잘 배우고 싶으면 현지인 남자 친구를 사귀라는 속설이 있는데, 그건 맞는 말이다.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증폭시키는 것은 사랑이거나 싸움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내 경험상 싸움은 사랑보다 어휘력을 극상으로 끌어올려 준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기회가 되면 일본어 이외의 다른 언어도 깊이 배우고 싶다. 손만 대고 끝났던 중국어도, 울렁증으로 미뤄왔던 영어도.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나의 감각과 세계를 넓히고 싶기 때문이다. 어순이 비슷해 비교적 쉽게 배우고 구사할 수 있는 일본어지만 어휘로 들어가면 재미있고 신비로운 발견이 무궁무진하다. 몸 담고 살아보면 그 재미는 배로 더 하다. 왜 아닐까. 이 책에 등장하는 한국어 어휘만 해도 모르는 게 수십 개는 되는데, 일상생활에 무리 없이 일본어를 구사한다 해서 다 알고 있다 착각하면 오산이다.
체험한 낱말의 개수가 살아온 나날만큼 늘 수 있기를 바란다. 동시에 체험하고 싶은 낱말을 수집하는 것은 매우 설레는 일이다. … 인간뿐 아니라 낱말 하나도 소우주다.
_『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2020)
황야를 보지 않은 이가 황야를 알 수 없고, 자아를 마주하지 않은 이가 아브락삭스를 이해할 리 없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좁은 틈 새길. 그 사이에 새로운 생각이 있고, 개념이 있다. 새로운 사고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다. 모국어 이외의 언어를 습득하고 구사할 수 있게 되면서 가장 아드레날린이 피어오르는 순간은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감각, 생각, 개념, 사고의 틈 새길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 문화에서 생기고 진화한 고유의 표현과 단어, 느낌과 정취가 있기 때문에 아는 단어가 늘어날수록 내가 반응할 수 있는 감각이 풍부해 짐을 느낀다. 일본어로는 알겠는데 한국어로는 등치가 안 되는 표현,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만나면 이제 반갑기까지 하다. 호그와트행 열차를 타는 런던 킹스크로스 역 9와 3/4 플랫폼을 내가 찾은 듯한 짜릿한 느낌.
내가 반응할 수 있는 단어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더 많은 더듬이를 가지고 나를 스쳐가는 사람과 사건, 그리고 현상들에 대해 꼭 맞는 단어로 이름 붙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그걸 표현할 길이 없는 나라서 아쉽기만 하다. 언젠가 나의 어휘와 문장으로 개념과 사고의 집 한 채 지어낼 수 있는 작가(作家)가 되었으면 좋겠다.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재료는 당연히 자기 자신이다. 내가 없으면, 구체적으로 나의 생각과 느낌이 없다면 글을 쓸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 목적이라면 일기 쓰기를 권한다. 이런 글쓰기는 분명 자기 치유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게 아니고서야 글 쓸 때 나는 이런 나이기를 바란다.
“내가 ‘나’라고 할 때는 당신들 모두를 가리키는 거요.” -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자료를 찾는 이유는 당신들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싶어서다. 그럴 만한 타당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싶어서다. 찾은 자료는 정작 10분의 1도 원고에 활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 앉으면 문장을 밀고 나가는 힘이 떨어지면서 스스로 부끄러워진다.... 요점은 자료나 속도가 아니라 자격이다. 당신들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노라는 자신감 없이 —설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글을 완성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자격은 남이 내게 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나만이 내게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_『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 서재(2020)
어휘든 경험이든 생각이든, 셋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글은 써지지 않는다. 가끔 회사에서 스킬로 양을 써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해 보이기는 한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와 동기와 결말이 오로지 개인인 ‘나’만을 위한 거라면 작가의 말대로 일기장이나 채우면 될 일이다. 내가 쓴 글이 우리를 위한 글이 되려면 그럴만한 자격을 지녀야 하고 그 근거가 자료라고 작가는 말한다. 사실 별것 아닌 이 독서노트를 발행하는 데에도 몇 년 전 읽은 책에 남겨둔 메모와 SNS에 올렸던 딸과의 일화, 그리고 신혼초부터 남편에게 보냈던 편지와 눈물 젖은 일기를 들춰 보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이런 것도 자료라면 자료일까. 실제로 이 글의 토대가 된 과정과 시간이 있었고, 그것을 거름 삼아 지금의 생각이 미숙하게나마 싹 틔울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빙서류라고 해야 할까.
어찌 되었든 야트막한 나의 삶 속에서 길어 올린 경험에 생각과 어휘를 덧 입혀 한 편의 글이 되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앞으로도 좀 더 부지런해야 할 것 같다. 스스로에게 확신과 자격을 부여하기에는 아직도 메꿔야 할 구멍이 너무 많다.
독서노트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한 꼭지 한 꼭지씩 떼어서 감상을 적고 싶을 정도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아마도 ‘쓰는 삶’을 동경하는 나에게 말과 글, 어휘와 언어는 늘 흥미롭고 붙잡아 두고 싶은 주제이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읽다 말고 몇 번이나 책을 내려놓고 깊은 한 숨이 나왔다. 어쭙잖게 뭘 또 쓴다고 그러냐… 이 정도는 고민하고 써낼 줄 알아야 작가라고 하는 거구나, 싶은 생각에.
책을 읽고 난 후의 Atfer버전은 이러했다.
아주 미묘한 차이인데,
책을 읽기 전에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받고 싶다는 알량한 생각이 컸다면, 책을 읽은 후에는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부분이 건드려졌을 때의 희열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특히 독서 노트에 담지 못한 4장의 주제들은 아직 내 안에서 결론 나지 않고 미처 사유하지 못해 본 것들도 있어서 앞으로도 끈을 놓지않고 곱씹어봐야겠다
한 줄 평을 하자면 [가볍게 읽으면서 어휘도 늘리고, 교양도 쌓이고, 지평도 넓히는 만병통치약 같은 책]
다음 선정 도서는 이기주 작가의 『글의 품격』인데 실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기대 반의 이유는 이번에 읽은 『어른의 어휘력』과 같이 말과 글을 주제로 한 내용이기에 계속해서 사유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고, 걱정 반의 이유는 전작인 『언어의 온도』가 전국적 센세이션을 일으킨데 반해 나에게는 그다지 큰 울림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좁은 편견을 씻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마주해야겠다.
실은 요즘들어 소소한 재미로 아이와 드로잉을 즐기고 있는데 요게 또 쏠쏠한 재미가 있다. (인스타그램에 조금씩 올려보고 있습니다.)
Cover illust by. @ishigaki.j
어른의 어휘력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