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바르텐스 『감정 폭력』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머리로 읽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으로 읽는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으로 읽으면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1년 뒤 이 책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책을 제대로 읽기가 버겁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이 문제가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새로운 멤버가 합류하여 모임명에 걸맞게 7명으로 출발한 2기 모임의 첫 번째 미션은 8주 동안 함께 읽을 4권의 도서를 선정하는 것. 책 선정 방식은 투표로 진행되는데, 7명의 멤버가 4권씩 읽고 싶은 책을 추천하고, 모여진 총 28권의 추천 리스트 중에 투표를 통해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순 + 가나다 순으로 정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로 꼽힌 책이 바로 이 『감정 폭력』이었다.
실은 내가 투표한 책은 따로 있었다. 특별히 싫어서였다기 보다는 흥미를 끄는 다른 매력적인 책들이 많았기 때문인데, 적잖은 멤버들이 이 책을 선택한 것을 보고 책 자체보다 선정의 이유에 더 관심이 갔다.
(이 책은) 신체적 학대보다 일상적이지만 치명적인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은근한 무시, 깔보는 듯한 발언, 애정을 볼모로 한 협박 등 수동적 공격의 형태를 띤 ‘감정 폭력’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과소평가됐다. 분명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회적으로 만연하다는 이유로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피해자들은 정신적 폭력으로 받은 괴로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온전히 혼자서 감당하라고 강요받는다. 실제로 피해자들은 ‘데이트 폭력’을 사랑으로, ‘가정 폭력’을 훈육으로, ‘가스라이팅’을 조언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이제는 당신을 위한다는 달콤한 거짓말로 자존감과 에너지를 훔쳐 가는 사람들과 현명하게 헤어져야 할 때입니다.”
_『감정 폭력』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 손희주 옮김, 걷는 나무 <저자 소개> 중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
나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고민해야 했다.
바로 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머리로 읽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으로 읽는 방법이다.
경험상 첫 번째 방법으로 읽으면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1년 뒤 이 책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책을 제대로 마주하기가 버겁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게다가 과거의 따끔했던 기억들과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수도 있다.
아마도 도서 선정 과정에서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는 무의식 중에 이러한 고민으로부터의 회피 동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일본어의 '뚜껑을 덮는다(蓋をする)'는 표현처럼 이제는 다 나았다고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우울하고 무거웠던 과거의 경험을 부러 뚜껑을 열어 들춰보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어설프게 첫 장을 넘긴 탓에 읽으면서도 몇 번을 손에서 놓고 다시 들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가정, 학교, 또래 집단, 직장, 연애, 결혼, 그리고 육아로 이어지는 인생의 변곡점들. 그 장면 장면마다 떠오르는 사람들의 얼굴. 그 관계 속에서 그들이 내게, 내가 그들에게 행했던 따뜻하지 못한 크고 작은 감정 폭력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쩌면 우리 모두 상처 주고 상처 받은 마음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을 아닐까...
결국 나는 두 번째 방법으로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을 고른 멤버들은 어떻게 책을 읽고 있을까?
책의 제목을 보고 아픈 기억을 떠올렸던 것은 아닐까.
책을 함께 읽으며 상처 받은 마음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선정 도서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가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 일이 상처가 될 정도로 심했나?”
“사람이 그 정도 말도 못 해?”
“예민하게 좀 굴지 마.”
“심각한 것도 아닌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넌 누가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절대 못 받아들이더라.”
_『감정 폭력』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 손희주 옮김, 걷는 나무
사실, 책을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우리 모두 감정 폭력의 유경험자다. 때로는 가해자, 때로는 피해자로.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감정 폭력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특히 의존적인 관계나 권력이 불균등한 상하 관계라면 더욱 쉽게 발생’ 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폭력은 이중으로 과소평가받는다. 첫 번째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행동이 분명한 감정적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회적으로 만연하다는 이유로 별일 아닌 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로 감정적 폭력을 통한 상처는 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피해가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 결과, 피해자들은 정신적 폭력으로 받은 괴로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온전히 혼자서 감당하라고 강요받는다.
때로는 가해자나 제3의 인물이 멋대로 폭력의 강도를 평가하기도 한다. 그들은 누가 들어도 공격적인 말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줄이고, 가볍게 여기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
_『감정 폭력』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 손희주 옮김, 걷는 나무
나 또한 거의 모든 페이지에 내 경험을 빗대어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습관적으로 '누가 범인인가'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를 따지고자 했던 것 같다. '그때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명백한 감정 폭력이었다. 나는 매우 아팠고, 회복하는데 상당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삐뚤어진 생각을 하는 것도 다 그들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을 즈음엔 그런 나의 주장에 정당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의 전반부는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충분히 아파해도 되는 거야. 아픔의 깊이는 다른 사람이 재단할 수 없는 거란다 라며 다독거려주었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도 원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범인이니 이렇게 응징해야 한다'는 권선징악적 처방전을 기대했다면 이 책은 다소 허무할 수 있다.
그래서 상처 받은 이 내 마음은 어떻게 하라고.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 것이냐고.
이런 경험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다시 말해 본인의 심리적 틀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삶의 어느 시기에 사건을 겪었는지에 따라 피해자의 심신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작은 사건이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는 사람도 있고, 심한 멸시를 받아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_『감정 폭력』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 손희주 옮김, 걷는 나무
사소하고 기분 나쁜 일을 조금씩 매일 당하면 내성이 생기지 않을까? 더 큰 굴욕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심리적 저항력’이 강해져서 상처를 덜 받는 게 아닐까?
_『감정 폭력』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 손희주 옮김, 걷는 나무
누구라도 감정의 긴 터널을 지나는 시기가 있다. 애써 밝은 척을 해 보아도 뒤돌아 서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고,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한 단어 때문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도 하는 시기.
난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쉽게 상처 받았고, 그만큼 똑똑히 돌려주겠다고 칼을 갈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난 몸무게만큼 예민했던 감정이 무뎌지고 둔해진 탓인지, 민감한 상황을 미리 감지하고 몸을 피하는 수완이 좋아진 것인지, 덕분에 그 주기는 이전보다 줄어들었지만 그 상처가 아주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는 이 정도쯤이야 배부른 고민처럼 느껴지지는 않을까?
목숨을 잃을까 봐 끊임없이 두려움에 떨고, 전쟁과 내전, 종족 간의 분쟁, 억압, 고문, 혹은 추방의 위협에 직면한 사람은 이런 문제들이 일부 선진국들의 ‘팔자 좋은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들의 눈에는 약간은 하찮게 보일 수도 있다. 나라 전체가 황폐해지고, 누군가는 불을 지르고 집단 학살을 자행하며, 약탈하는 살인귀에게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두려움과 비교했을 때 직장에서 받는 약간의 스트레스를 무엇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나보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분명 이만한 생활환경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운명에 너무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개인이 앓는 심리적 고통은 어떤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도 측정할 수 없다. 고통에 수반된 스트레스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느낀 괴롭힘의 정도와 충격을 정의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고통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_『감정 폭력』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 손희주 옮김, 걷는 나무
모든 폭력은 저마다 아프다. 그러니 혹시 지금 이 순간 감정 폭력의 중심에 서있는 당신이라면 다른 이의 상처를 보며 공감은 하되 자신의 상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 감정 폭력의 상처는 누가누가 더 아픈가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만큼 나를 충분히 돌보고 회복하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맞지 않는 신발에 발을 억지로 구겨 넣을 필요는 없다.
나를 불편하게만 만드는 관계는 이제 그만 접어둘 것. 내가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든다면. 주체를 나를 바꾸고, 편하게 생각할 것. 누구에게도 나를 구겨서 맞춰가지 말 것.
_『나를 사랑하는 연습』 정영욱 / 부크럼
이 책을 읽는 것이 아프다기보다는 이해가 되는 당신이라면 감정 폭력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난 이제 괜찮아'하고 한 숨 돌릴 수 있는 시기에 접어든 것 일수 있다. 그런 당신과 나에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 바로, 감정 폭력의 연쇄 고리를 끊기 위한 노력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화나게 한 사람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손쉬운 희생자를 찾아 화를 낸다. 분노와 증오를 분출하는 방향을 바꾸어 재빨리 적당한 희생양을 찾아 쏟아내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최근의 사회 문제도 이와 비슷한 면이 많다. 억압받고 무시당한다고 느끼고, 사회의 어두운 면만 보고 자라고, 자신을 패배자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분노를 다른 약자에게 표출한다. 여성이나 노인, 외국인, 난민과 같이 자신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문제에 폭발하는 것이다.
이런 부적절한 심리적 차별과 억압은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전혀 설명이 안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회에는 여전히 각종 혐오주의가 만연하다.
_『감정 폭력』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 손희주 옮김, 걷는 나무
감정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그리고 그 피해는 점점 더 약한 자들에게 전이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환대와 멸시.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람의 감정을 좀먹는 감정 폭력의 피해는 야비하게도 점점 더 약한 고리를 타고 흘러들어 간다. 내가 받은 상처를 내 안에서 처리하지 못하면 다른 2차, 3차 피해를 낳을 수 있다. 가정 내에선 엄마가 아이에게, 친구들 사이에선 또 다른 약점을 가진 친구에게. 사회 전체로 보면 여성, 노인, 외국인, 성소수자, 난민과 같은 나보다 더 약한 카테고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칼날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감정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건전하게 아픔을 치유해야 하는 책임과 동시에, 이 지저분한 폭력이 또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도 가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전이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어쩌면 감정 폭력은 코로나보다 무서운 감염병일지도 모른다.
감정에도 백신과 마스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