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멜라 단편 소설집
주의
얼마 전 나는 ‘소설이 어렵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 이유는 소설을 제대로 즐기려면 충분히 몰입을 해야 하기 때문인데, 첫 장부터 작가가 초대하는 세계에 금방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제일 처음 나를 곤란에 빠뜨린 소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들어는 봤나.
빛의 아들, 『람세스』
당시 책 좀 읽는다 하는 집엔 요 람세스가 세트로 구비되어있었다. 1997년 문학동네에서 초판이 나왔고 내가 처음 접했던 건 1998년이었으니 당시로선 하태핫태한 신간이었던 것. 탐독가를 꿈꾸던 나는 중학교에 올라가며 소위 겉멋이 들기 시작해 ‘나도 좀 있어 보이는 책을 읽어보아야 하지 않겠냐’며 손을 대게 되는데...
기원전 13세기 이집트를 67년 동안 다스렸던 파라오 람세스를 주인공으로 한 크리스티앙 자크의 장편소설은 3권 중반부쯤에서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한동안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기로 다짐했을 정도로 그 상처는 깊고 오래갔다.
이제는 안다.
그 책이 왜 나에게 어려웠는지.
그전까지 읽은 책들은 내가 알고 있는 범주의 세계 안에서 ‘있음 직한 일을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람세스는 귀 밑 3센티 단발머리 여중생에겐 전혀 새로운 시공간을 만나는 일이었다. 처음 만난 세계의 광활함에 압도당했던 것.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끝인지 가늠할 수 없는 낯선 세계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끊임없이 등장했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경험을 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정말로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3권까진 읽은 기억이고 그 뒤부턴 야한 장면만 골라보는 걸로 대신했다.
그 뒤로 내 주변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책들은 가까이하기가 꺼려졌다. 용기가 필요했다. 우주, 과학, 물리, 수리를 다루는 분야의 독서가 현저하게 적은 것도, 소설이라고 하면 일단 겁부터 내는 것도 (고전문학은 그 정도 까진 아니었는데... 긁적;;) 다, 람세스 탓으로 돌렸다.
상처는 계속 들여다보면 낫지 않는 법이다. 모르고 지내다 어느 날 문득 ‘어? 딱지 떨어졌네?’ 하는 것처럼 그렇게 람세스와의 추억이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졌을 때 즈음, 나는 익숙한 세계, 알고 있는 범주,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사고하고 움직이는 서른 중반의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임에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괴물을 만나기 위해 책장을 펼칩니다.”
_『읽다』 김영하, 문학동네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책은 나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감성적 자극제이기도 하지만 공감되지 않는 많은 불편한 생각을 품고 있는 창고이기도 하다. 공감되는 책만 계속 찾아 읽으면 마음은 편안해지지만 낯선 생각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_ 『책 쓰기는 애쓰기다』 유영만, 나무생각
내가 편하고 좋은 이야기, 알 법한 이야기만 보고 듣는다면 독서는 자위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닐 것이다. 책과 이야기를 통해 내가 겪어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나에게 주는 물음과 불편함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질수록 이해와 공감의 독은 깊어지고, 사유와 지평의 폭은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은 늘 혼란스럽고, 낯설고, 때로는 불편하다.
올가을 초입, 그런 책을 만났다.
당신은 이 소설들을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없다. 이 책과의 만남이 편안하고 유쾌한 경험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발견할 것이다. 한번 닿으면 뇌리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얼음의 문장과 마취제도 없이 몸속을 휘젓는 그로테스크의 칼날을.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어떻게든 풍기고야 마는 생의 질긴 악취를. 다정한 공감이나 한 방울의 위로 대신, 세상의 어둠 속에서 미량의 빛을 포집하기 위해 확장되는 예민한 동공을. 작가가 제기하는 의의들 ㅡ 보편적 인식 앞에 송곳니를 드러내는 그 지독한 질문들 한가운데 던져진 당신은, 손쉬운 치유나 희망이나 화합이 보이지 않음에도 끝내 좌절에 매몰되지 않는 인물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악수를 청하고 싶어 질지 모른다.
_ 소설가 구병모, 『적어도 두 번』 김멜라 단편 소설집 추천의 말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자음과 모음의 신인 문학상을 수상한 [홍이]를 비롯해, 계간지 『자음과 모음』에 수록된 작품 및 미발표작을 엮어낸 것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워낙 생경한 것들이라 지인의 추천이 없었다면 아마 영영 모르고 지나쳤을, 그런 세계를 그린 작품이었다.
소설의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등번호 9번에 윙포워드, 머루, 차콜그레이 그리고 IS다. IS는 인터섹스의 줄임말인데 섹스란 말이 들어간다고 해서 날 이상하게 보면 곤란하다. 그건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고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엄마 탓도 아니다. 난 교회에 다니지 않으니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버섯이 있을 뿐이다.
_ 「호르몬을 춰줘요」/『적어도 두 번』 김멜라, 자음과 모음
무방비 상태로 첫 장을 젖힌 순간, 빠지직. 내 안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젠더, 여성, 퀴어 등, 흔히 소수자로 분류되는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존재를 처절히 증명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 뒤를 좇다보면 이전까진 있는 줄도 몰랐던 그들의 존재가, 생각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가 된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지금까지 내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덱스가 생겨났다.
사실 [젠더, 퀴어, 소수자]라는 키워드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또한 그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소설 속 중경처럼 그들을 볼 때면 ‘소리 없이 날아온 돌에 가슴을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라보는 자의 입장이었을 뿐’ 그들이 내 삶에 파고드는 일은 없었다.
물론,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젠더 감수성이 좀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건 내가 놓여진 상황까지이지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해선 여전히 무지하고 존재 자체를 감지조차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기에 너무 거칠거나 협소한 일부 주장들에 대해서는 일부러 관심을 끄려 하기도 했다.
“차라리 인간 따윈 그만두고 로봇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로봇은 남자 여자 구별 없이 그냥 로봇일 뿐이니까”
_ 「호르몬을 춰줘요」 『적어도 두 번』 김멜라, 자음과 모음
작가는 내가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이래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그려낼 뿐이다. 그렇기에 편견과 오해, X냐 Y냐는 식의 이분법을 내려놓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경계에 서 있는 그들의 시시콜콜하고 당연한 요구와 유쾌하고 애틋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문학적 아름다움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미지의 내가 되어보려는 몸부림은 낯선 마주침이 낳는다.
_ 『책 쓰기는 애쓰기다』 유영만, 나무생각
그렇게 어렵고 낯설기만 했던 소설은 오랫동안 굳어 있던 사유에 새 살이 돋게 해 주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내 안에는 없는 그 답을 다른 이의 생각에서 훔쳐올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소설이 뭔지를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흔드는 한 권의 소설을 만나는 일이다.
가을의 입구에서 만난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두 번 아니라 몇 번이라도 나를 흔들어주었던 작품으로 오래오래 가슴에 품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