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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Aug 30. 2020

그녀들의 하루가 쌓여 『예술하는 습관』


대체 어떻게 해낸 거지?


『예술하는 습관』은 ‘헌신적인 아내와 하인, 상당한 유산, 그리고 몇 세기 동안 누적된 특권에 힘입어’ 업적을 세운 남성 예술가들에 비해, 가정과 육아 그리고 창작을 동시에 처리해야 했던 여성 예술가들의 삶에 어떻게 예술적 영감이 싹틀 수 있었는지, 지난 400년간 이름을 알린 (서양의) 여성 예술가 131명의 일상적인 루틴과 작업 습관을 방대한 자료와 호기심으로 엮어낸 책이다.


책 속에는 실로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는데, 아는 이름보다 모르는 이름이 많은 것은 당연하거니와, 각각의 처한 상황도 천차만별인지라 그녀들의 유일한 공통점을 꼽는다면 말 그대로 '저마다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글쓰기에 가장 완벽한 하루가 언제냐는 질문에 '하려고만 하면 거의 모든 장소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소설가 유도라 웰티*. 하루에 진한 커피를 스무 잔 넘게 마시고, 담배 세 갑을 피웠다는 릴리언 헬먼*. 끝이 나지 않는 집안일 사이사이에서 '마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이 글을 써 내려간 해리엇 비처 스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지독하게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식단을 고수했던 페타 코인*. 날카로운 비판 의식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수전 손택*은 엄마로서의 의무를 도외시하는 것으로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며, 그 일화로 아들에게 '요리를 해주지 않'고 '그냥 음식을 데워줬'다고 고백한다. 또한 담배에 불을 붙일 수도 없을 정도로 집필에 몰두한 손택에게 당시 열 살인 아들 데이비드가 대신 담뱃불을 붙여줬다는 비화도 있으니, 손택의 글보다 그녀를 먼저 알았다면 지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를 존경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일화는 20세기 남성 중심적이던 프랑스 영화계에서 입지를 굳힌 최초의 여성 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일화다. 1974년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그녀에게 독일의 한 방송사가 1년 내에 새 영화를 제작하는 조건을 걸었고, 바르다는 위기를 기회삼아 '여성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하고 흔쾌히 작업에 착수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집에 갇혀 지낸다는 사실에 착안해 자택의 두꺼비 집에 80미터짜리 전선으로 자신의 몸을 묶어두고 그 반경 내에서만 촬영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제한된 조건을 위트 있게 활용함으로써 훗날 그녀는 크고 많은 경험을 통해 '자기 안에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특권'을 즐겼다고 한다.


이 방은 작업실입니다.
노크 없이 들어오지 마세요.
노크하고 나서 대답을 기다리세요.
대답이 없으면 그냥 가세요.
다시 돌아오지 마세요.
모두에게 하는 경고입니다.
당신도 예외는 아닙니다.
밤낮없이 언제나 적용되는 경고입니다.
- 릴리언  헬먼 Lillian Hellmen (1905~1984)

『예술하는 습관』p.45  메이슨 커리, 이미정 옮김 / 걷는 나무  


글 쓰는 시간을 되찾기까지


1930년대. 옥스퍼드 대학의 최우수 학생이었던 페넬로페 피츠제럴드*는 졸업 당시 놀라운 경력을 이어나갈 인물로 모두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의 위기와 재정적 압박, 세 명의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일상이 지속되자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지 못할 거라고 체념하며 살았다. 피츠제럴드가 정식으로 자신의 문학적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된 것은 마흔네 살이 되던 해. 막내아들이 집을 떠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결혼 생활의 막이 내린 후에야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정신적 여유를 되찾았다고 한다. 쉰여덟에 첫 작품을 내고 마지막 소설 『푸른 꽃』으로 예상치 못한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80세였다.


그렇게 글 쓰는 시간을 되찾기까지 많은 시간을 돌아온 피츠제럴드가 1973년 딸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딸들의 마음을 흔든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단다."
-페넬로페 피츠제럴드 Penelope Fitzgerald (1916~2000)

『예술하는 습관』p.152  메이슨 커리, 이미정 옮김 / 걷는 나무  


이 시대의 모든 린다 브렌트들에게


노예제도가 아직 남아있던 1813년의 미국.
노스캐럴라이나주 에덴턴에서 노예로 태어난 해리엇 제이콥스*는 수년 동안 주인의 성적 노리개로 고통받다 간신히 도망친 이후, 다시는 불러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를 노예제도 철폐라는 대의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린다 브랜트'라는 가명으로 자서전 『린다 브랜트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서른아홉이 되던 해에 쓰기 시작한 기록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857년에 완성되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출판된 책은 당대에 빛을 보지 못하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잊혀지다, 21세기 후반에 재발견되면서 마침내 그녀의 자서전이 누려야 할 마땅한 지위를 되찾았다고 한다.


"혼자 조용하게 보낼 수 있는 두 달의 시간의 훔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더라도 밤낮으로 글을 쓰겠다."
-해리엇 제이콥스 Harriet Jacobs (1813~1897)

『예술하는 습관』p.259  메이슨 커리, 이미정 옮김 / 걷는 나무  




책에는 소개된 모든 여성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뚫고 나온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18세기의 여성과 21세기의 여성. 일곱 아이를 키우던 여성과, 결혼하기를 거부한 여성. 노예의 삶을 산 여성과, 하인을 여럿 거느렸던 여성.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완벽한 루틴을 고수했던 여성과, 술과 담배 때로는 약물에 기대어 창작의 고통을 달랬던 여성. 시인과 작가, 조각가와 음악가, 성악가와 무용수 등 그 활동 무대도 다양하다. 이뿐 이겠는가.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름 모를 수많은 여성들의 서사가 있었을 것이다.


비법이라도 구해 볼 요량으로 읽기 시작했던 불순한 생각이 페이지를 넘길수록 명료해졌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며 채워온 그녀들의 하루가 쌓여 이 시대의 우리가 있고, 언젠가 우리들의 발자국이 모여 다음 세대가 수월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거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어떤 하루를 채워나가야 하는가.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나만의 넓은 책상을 들이는 일도 더 이상 미루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하루로 우리의 시대를 만들어 가는 모든 여성 동지들이여! 훗날 어떤 책의 어느 페이지에 기록되지 않더라도 삶을 의미 있는 기록으로 채워나갈 수 있기를! 이 독서 노트 또한 그 발버둥 중의 하나로 기억되기를!


나의 글쓰기와 삶이 뒤섞이기를 바란다. 내 책이나 글쓰기 자체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글은 하루하루의 내 생각과 다를 게 없어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글쓰기와 삶이 구분되지 않고 똑같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글쓰기와 삶이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면 글쓰기가 종이 위에서 살아가는 내가 된다. 내가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기 전에 살고 있었던 삶의 연장선이 된다.
-실라 헤티 Sheila Heti (1976~)

『예술하는 습관』p.204  메이슨 커리, 이미정 옮김 / 걷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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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라 웰티 Eudora Welty (1909~2001)

*릴리언 헬먼 Lillian Hellmen (1905~1984)

*해리엇 비처 스토 Harriet Beecheer Stowe (1811~1896)

*페타 코인 Peta coyne (1953~)

*수전 손택 Susan sontag (1933~2004)

*아녜스 바르다 Agnes Varda (1928~2019)

*페넬로페 피츠제럴드 Penelope Fitzgerald (1916~2000)

*해리엇 제이콥스 Harriet Jacobs (1813~1897)

*실라 헤티 Sheila Heti (1976~)




덧.

네 번에 걸친 온라인 독서모임 [Book두칠성]의 1기 모임이 이것으로 끝이 났다. 함께 읽고 함께 썼던 네 권의 책과 독서노트. 신선했고 즐거웠으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름방학 같은 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에는 또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지 ...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함께 빛나는 북두칠성의 별자리를 닮은 모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지금 코붱님의 브런치에서 2기 멤버를 모집 중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곤 했지만 오늘이 마감일이네욧!!!! >_<)


https://brunch.co.kr/@koboung/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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