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설거지를 하면서 ‘영화 & 박선영입니다’의 예전 회차들을 듣고 있다.
어제와 오늘 들었던 편들의 초대 손님은 황석희 번역가.
보통 1명 당 1회인데 2회차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작업한 자막만큼이나 입담이 좋으신...
그의 번역을 오마주 해서 격하게 표현하자면 ㅈ나 좋았다... 고 할 수 있다.
번역과는 다르게 평상시 그의 언어에는 욕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구수하면서도 똘끼 가득한 번역이 나오는지... 재능의 영역인가.
그가 했던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에 대한 내용이었다.
자막이 가지고 있는 형식미.
삼각형..사각형.. 띄어쓰기는 한 줄에 2개 이하.. 등등
번역에도 그들만의 황금비가 있다는 것.
그것을 강박처럼 지키던 사람이 있었고
황석희 번역가가 예전에 극장에서 그가 번역한 영화를 보았을 때
영화를 보아야 하는데 계속 자막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눈을 채운 것은 스크린의 배경과 인물들이 아니라 흰색의 모양들뿐이었다고.
극장에서만 적용되었던 자막이라 이제는 기억 속에 형체만 남았지만
'번역이 예술이 될 수도 있구나' 하고 느낀 자막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 그 번역가가 작업한 자막들을 보면
철저하게 형식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쓰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왜 그렇게 변한 것인지는 황석희 번역가도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아마 정확한 이유는 그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과연 어떤 마음일까.
마치 오래된 예술가가 어떤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표현하는 것처럼
오래된 번역가의 삶 속에서 무언가 깨달은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그저 노력할 힘도, 의지도 없어
번역에 품을 들이는 것이 마냥 귀찮아진 것일까.
애초에 절대적인 '미'라는 것이 존재는 할까?
번역가가 말한 자막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그럴까.
어딜 가나 이상은 존재한다.
학교에서도 이상적인 학생, 선생,
직장에서도 이상적인 선임, 후임, 대표.
좋은 애인은 어떤 애인인지, 진짜 친구는 어떤 친구인지.
그리고 20대 후반, 30대 초반, 30대 중반...죽을 때까지
이 나이에 이 정도는... 하는
최소한인 것처럼, 기본적인 것처럼 말을 하지만
지켜야만 이상적인
그렇고 그런 형식미들.
또 한편으로 누군가는
아 됐어.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거지.
그런 것이 다 무슨 상관이야.
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치 그런 형식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속물이거나
틀 속에 갇혀 빠져나올 생각을 못 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이야기할 때도 있다.
인터넷에는 마치 자신이 헤세가 된 듯이 그들에게
'알을 깨고 나와!' 하고 강연자가 열정을 다해 말하는 영상들이 떠돈다.
정말 바보일까.
누구의 말이 맞는지,
어떤 것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삶인지.
모르겠다.
아니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단지 자신의 삶에 비춰 판단할 뿐이지.
황석희 번역가가 말했던 번역가는
놀랍게도
박지훈 번역가였다.
대한민국 관객들의 공공의 적이 된 바로 그.
그의 자막을 보며 황석희 번역가는
번역을 더욱 잘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재미난 것은
기존의 아름다움을 본받고자 한
그가 지금은 기존에는 없던 자막들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하여튼 하고 싶었던 말은
영화& ㅈ나 재밌다는 거.
물론 이 또한 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