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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도르 Feb 18. 2022

아름다움, 잔혹한



며칠 동안 읽던 시집을 완독했다.

영화 <캐롤>을 오랜만에 보고 나서

마침 즐겨 듣던 계정에

아주 마음에 드는 플리가 올라와서

함께 들으면서 읽었다.

캐롤이 좋았던 걸까, 음악이었을까, 시집이었을까.

아름다운 것들.



어떤 깊고 얕은 풍경 앞에서도 나는 당신을 떠올리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온전히 다 나의 것이었다니

이제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

반복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렇다는 사실일까, 그럴 것이라는 다짐일까.

또 다른 새로움은 한가함에서 발견한 나의 것을 말하는 것일까

당신을 떠올리지 않는 것을 생각하느라

역설적으로 당신이 생각하고 발견하는 과정의 새로움을 말하는 것일까.

비가역.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던 시.

오랜만에 첫 페이지부터 마음을 사로잡은 시집이었다.


누구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영역에 별보다

죽은 자들이 더 많으면 곤란하다


빈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 어둠 속 저수지 근처 폐사지의 삼층석탑, 차창으로 얼핏 보았던 과일을 감싸고 있는 누런 종이들이 내뿜는 신비한 기운


이런 것들에 왜 잔혹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몸서리쳐야 하는지 슬픔이 왜 이토록 오래 나의 몸에 깃들어야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 것만 같다


당신은 명왕성보다 멀어서 아름답고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없다


당신과 내가 이 영역에 함께 있다


/

시인이 '아름다움'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드러나고, 가장 좋았던 시.

잔혹하며,

멀기에

만날 수 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미혹 당했던 적 있었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손등에 바로 쏟아지듯 고통과 환희를 느끼며 펄펄 뛰었다

누구나 완벽하게 평화롭기는 어렵다 그래도

생의 괴로움에만 집중하는 순교자가 되고 싶다 아름답고 끔찍한 삶이 당분간 지속된다


/

나에게도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손등에 바로 쏟아지듯

고통과 환희를 느끼며 펄펄 뛰었던 시절이 있었을까

언제부터 나는 지루한 열정 속에 살고 있는 걸까

당분간... 그는 얼마나 오래 순교자로 살 수 있을까.

당분간이 보통의 생각보다 긴 단어이길.


빈틈없는 죽음이란 없는 거구나 허술한 죽음만이 죽음 같구나 아, 어쩌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너무 오래 아껴두었구나

그토록 오래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이제야 이해하겠다 이제야 용서할 수 있겠다 그대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로 했구나 삶이여, 이제 나는 없다 그러니…


/

빈틈없는 죽음이 아니라 허술한 죽음인 까닭은

지우지 못한 흔적이 아니라

남기지 못한 흔적 때문이어라.



이외에 좋았던 시들.



지극하게 아름다운 것들과 마주치게 될 때의 감정은 늘 알 수 없는 어떤 슬픔이었다.

무질서를 지향하는 그 세계의 심연으로 나는 한쪽 발을 빠뜨리고 있다.

건강한 슬픔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아름답게 한다. 나는 당신에게 그런 슬픔을 안겨주고 싶다

뒤표지 글 中


/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이러저러한 기회로

미美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는 듯하다.

책상 위 거꾸로 엎어 놓은 투명한 유리잔 안에

'아름다움'을 넣어 놓고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관찰하는 것 같았던 시집.

시인의 다른 시집들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시집을 읽으며 함께 들었던 플레이리스트.

플리 계정 딱 두 개 구독하는데 그중 하나

https://www.youtube.com/watch?v=G89e9Bzoc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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