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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도르 Jan 29. 2021

필수불가결한 마음

며칠 전, 한 친구에게 우연히 유성을 보았다고 연락이 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를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서로의 소셜미디어에  관련 글이 올라오면 이따금 안부를 물을 겸 연락하던 친구였다. 그는 별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원을 빌었다고 말했다. 그중 나에 대한 소원도 있었다. 내가 쓰고 있는 시들이 세상에 나와 더 빛날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소원이었다. 참 고마운 마음이었다. 과거에 내가 쓴 시들을 처음 보여주었을 때 그는 선물을 받은 것 같다며 한없이 기뻐했다. 차마 부끄러워 숨겨놓았던 시들을 그는 진심으로 아껴주었다. 그가 보여준 귀한 마음은 나에게도 무척 소중한 것이었기에 그 경험을 담은 시를 한 편 써 그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나보다 나의 시를 더 사랑해주는 그는 별 볼 일 없는 나의 시들을 위해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의 빛살을 붙잡고 부탁했던 것이다.



친구는 유성을 보기 전 마침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보았다고 했다. 그 짧은 순간 나에 대한 소원을 빈 것은 그날 그가 윤동주의 벗이었던 정병욱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윤동주는 학교를 졸업하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탄압의 빌미가 될 것을 우려한 주변의 권고로 결국 출판을 미루게 되었다. 그의 자필 시집은 모두 3권이었고, 그중 1권을 정병욱에게 주었다. 이후 정병욱에게 건네준 시집만이 살아남아 ‘서시’, ‘자화상’ 같은 시들이 빛날 수 있게 되었다. 윤동주가 투옥되고 본인은 학도병으로 일본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정병욱은 어머니께 시집을 맡기고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잘 지켜 달라 부탁했다.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출판을 부탁한다며 일종의 유언을 남겼다. 다행히 정병욱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귀중하게 숨겨놓았던 시집을 꺼내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를 발간하였다.





정병욱은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를 만나 2년간 함께 했다. 그는 항상 윤동주의 시를 읽는 최초의 독자였다. 윤동주는 평소 다른 사람의 지적에 따라 자신의 시를 고치지 않았지만, 정병욱의 조언만큼은 항상 귀 기울여 들었다. 정병욱은 ‘별 헤는 밤’의 초고를 보고 나서 어쩐지 끝이 허한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했다. 그 후 윤동주는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라는 마지막 연을 추가해 시를 완성했다. 이렇듯 지금 우리가 읽는 윤동주의 시가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벗의 시를 지지하고 지키고자 했던 정병욱의 진심과 그에 대한 윤동주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겨울이 되고 영화 <윤희에게>를 다시 보았다. 작년 개봉한 이후 영화관과 집에서 각각 2번씩 이미 총 4번을 본 영화였지만 또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12월에 접어들어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영화 속 배경이 겨울의 오타루인 것도 있었다. 일본의 오타루는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이기도 하다. 눈 덮인 설원과 일본 마을, 온통 새하얀 풍경은 언젠가 한 번쯤 그곳에 가고 싶게 만든다. 영화 속 오타루는 끝없이 내리는 눈만큼 한없이 넉넉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배경의 아름다움도 있었지만,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간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다정한 온도였다. 상대를 향한 따스한 시선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보는 내내 두꺼운 겨울 이불을 감싸고 누워 있는 것과 같은 온전한 안정감을 주었다.



이혼 후 윤희에게 남은 가족은 딸 새봄뿐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새봄은 일본의 쥰이라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무렵에 만나다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윤희의 숨겨진 첫사랑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먼저 보게 된 편지를 다시 우편함에 가져다 놓고 모르는 척 엄마를 살피던 새봄은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 결국 새봄은 졸업 여행이라는 핑계로 엄마를 이끌고 오타루로 떠난다. 사실 새봄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쥰이 아니라 그녀의 고모 마사코였다. 마사코는 오랜 시간 쥰의 곁에서 함께 한 동반자이자 깊은 유대감을 가진 사람이다. 우연히 쥰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발견한 마사코는 매번 그녀가 부치지 못하던 편지를 그녀 몰래 한국의 윤희에게 보낸다. 그렇게  윤희와 쥰은 20년 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각자의 차디찬 삶을 버티다 마침내 재회한다.



이렇듯 윤희와 쥰의 감춰둔 마음을 발견하고 이를 모르는 척 도우며 행복을 바랐던 주변인들의 진심이 있었기에 그들의 오랜 그리움의 시간이 끝날 수 있었다. 윤희는 애써 외면했던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며 오히려 그 속에서 부정당했던 자신과 사랑의 존재를 다시 발견한다. 재회를 통해 그녀는 스스로 벌을 주며 살아온 삶을 끝내고 새로운 꿈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윤희에게 있어 사랑은 진심이었고 윤동주의 시 또한 그러하였다. 그것을 지켜준 것 또한 누군가의 진심이었다. 한 사람의 진심이 온전히 지켜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진심이 필요하다. 소중한 만큼 무겁기에 혼자서는 결국 내려놓기 십상이라 함께 들어줄 누군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나의 마음 또한 몇몇 이유로 스스로에게  외면받아 방치되고는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감사하게도 수북이 쌓인 먼지를 닦아 내고 소중히 어루만져 나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얹어 놓는 이가 있었다. 덕분에 나의 진심은 지금껏 색을 잃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



어느덧 12월,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위해 대신 기원하듯 안부를 전한다. 그럴 때면 이따금씩 우리의 바람은 스스로가 아니라 서로의 바람으로 인해 지켜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으레 하는 새해 인사조차 그런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위하는 소중한 마음은 그 무엇보다 단단하게 그의 마음을 감싸 지켜줄 것이다.  진심은 진심에 필수불가결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의 정병욱에게 감사하며 나 또한 누군가의 새봄이 될 수 있길.



20.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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