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토리 Jul 16. 2024

정 떼려고 그러나

쉰 살의 유학일기 - 다시 여름 #8

호텔 체크인.

이제 여기에서 3박 4일을 머물다가 일본을 떠난다.


아침 10시에 시작한 立ち合い(타치아이, 이사 전 점검)는 15분 만에 끝났다.

물 틀어보고 전등 켜보고 문 열어보고 벽지, 장판 훑어보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마사미언니가 함께 있어줬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악명(?) 높다는 일본의 타치아이는 케바케, 사바사였나보다.


일본에 오기 전 한인부동산을 통해 온라인으로 구한 집은 참 내 맘에 쏙 들었다.

다른 집에 살아본 적이 없어 비교대상도 없지만 아늑하고 조용하고 주변에 있을 거 다 있고 아무튼 덕분에 1년을 참 잘 살았다.

코딱지 만한 집에 살림 채워 넣는 것도 좋았고 주먹만한 살림살이들로 소꿉장난하듯 밥 해 먹는 것도 재밌었다.

손님이 오면 와서 좋았고 혼자 있으면 혼자라서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집도 떠날 때가 되니 정을 떼려는 건지 두어 달 성가신 변화가 있었다.


6층짜리 건물의 26가구가 사는 아파트.

작은 원룸으로만 구성 된 아파트라 그런지 입주민들의 이사가 꽤 빈번했다.

일본은 빈집의 우체통엔 우편물을 넣을 수 없게 테이프로 입구를 막아놓기 때문에 쉽게 입주 여부를 알 수 있다.

우리 집은 놀러 오는 사람들마다 ‘이 동네엔 사람이 안 살아?’ 라거나 ‘이 건물엔 너 혼자 살아?’라고 물어볼 만큼 층간소음 벽간소음 없이 완벽하게 조용한 집이었다.

오죽하면 남편 혼자 남겨놓고 학교에 갔을 때 남편이 지구 위에 TV와 단 둘이 남겨진 기분이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두어 달 전부터 새로 바뀐 입주자들이 좀 수상(?)했다.


스멀스멀 화장실 환기구로 담배냄새가 나더니 엘리베이터 문 앞에 턱 하니 머그컵 재떨이가 놓여졌다.

아무리 담배에 호의적인 일본이라지만 즈이 집도 아나고 공용공간인 복도에 왠 재떨이?

그 재떨이는 관리인이 치워주는지 서너개피의 꽁초들이 일정하게 들어있었고 궂은 날엔 냄새가 더 드럽게 느껴졌다.

나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학교가는 길에 재떨이를 집어서 건물 밖 자판기 옆에 내다놓았다.

우리 집은 건물 끝집이라 엘리베이터와는 제일 멀지만 바로 옆에 비상계단이 있다.

건물 내에 있는 비상계단이지만 시멘트가 아니라 철구조물의 계단이라 오르내릴 때 소음이 꽤 크다. 나는 엘리베이터 점검하는 날 딱 한번 사용해 봤다.

그런데… 우리 집과 마주 보는 앞집 남자가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오르내린다.

게다가 이용시간도 일반적이지 않다. 밤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온다. 리드미컬 하게 쿠다라라랑쿵, 쿠다라라랑쿵, 쿠다라라랑쿵…

친구인지 애인인지도 자주 드나들어 여러명이 우르르 몰려가는 날에는 어찌나 소리가 큰지 깜짝 놀라 잠에서 깨는 날도 많았다.

처음엔 혼자 사는 것 같은 이 건물에 사람기척이 느껴져서 반가웠는데 매일 이러니까 짜증이 났다.

높은 층수도 아닌데 운동삼아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시끄럽게 왜 저러는지, 누가 일본인은 민폐 끼치는 거 싫어한댔어!!!

관리회사에 연락할까 하다가 두 달만 참자, 한 달만 참자 하며 지냈다.


어젯밤, 이삿짐을 싸고 마지막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원래 쓰레기는 요일별로 분리해서 내놓아야 하지만 청소하다 보니 이것저것 다 나오는 바람에 봉투는 분리했지만 한꺼번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구별해서 치워가겠지…

오늘(7월 15일)은 ‘바다의 날’이라 휴일이니까 쓰레기를 가져가지 않았을 거고 그럼 쓰레기장에 쓰레기가 분명 넘쳐날 거니까 문을 살며시 열고 안에 있는 쓰레기 뭉치들이 쏟아지기 전에 잽싸게 던져 넣고 문을 팍! 닫아야지~~

얼마 전 무심코 쓰레기장 문을 열었다가 쌓여있던 봉지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당황했던 적이 있어서 오늘은 나름 짱구를 굴리며 한 손에 쓰레기봉투 서너 개를 들고 흔들흔들 흔들다가 한 손으로 문을 빼꼼히 연 다음 반동을 이용해 후다닥 던져 넣고 문을 닫았다. 아싸, 미션성공!!!


… 아, 욕 나온다… 손가락에 걸어놓았던 집열쇠고리까지 던져졌다…

다시 쓰레기장 문을 열었다. 예상보다 쓰레기가 많지 않아 무너져 내리지도 않네… 괜히 오바했구만.

내 손으로 쓰레기 산을 허물어 열쇠고리를 찾았다.

이거 못 찾으면 24시간 긴급출동 서비스 부르고 3만 엔이라는 거금을 주고 손잡이를 통으로 교체해야만 한단 말이다.

나는 내일 이사갈건데! 내일!!!

찾았다, 다행히 봉다리 대여섯 개만 들춰내니 열쇠가 보였다.

지난겨울 놀러 온 막둥이가 쌓인 눈보고 흥분해서 폴짝대다가 눈밭에 휴대폰 빠뜨렸을 때만큼 당황했다.

그때는 한겨울에 맨손으로 눈을 파냈는데 지금은 한여름에 쓰레기통을 뒤졌다.

이누무 집에 정 떼려고 그러나 요새 왜 이렇게 없던 사건들이 생기나 모르겠다.


이제 나는 이 집을 떠난다.

아마도 다시는 이 집에 들어올 일이 없을 것이다.

작년 6월 28일, 열쇠 하나 달랑 들고 이 집에 들어올 때 모습 그대로 오늘 그 열쇠를 관리인에게 넘겨주고 나왔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손끝에 전달되는 아날로그 열쇠의 손맛은 느낄 수 없지만 이제 주머니 가벼운 번호키의 디지털세상으로 이동한다.

막판에 사소한 문제들은 있었지만 그래도 정 떨어지지않고 좋은 마음만 간직하며 떠난다.

사요나라, 야마하나 e-horizon

올 때보다 두배가 늘어난 내 이삿짐


p.s 오늘까지 사용한 전기료와 수도료, 급탕료 등은 계량기 검침 후 2주 이내에 금액을 알려주겠단다.

나 여기 없는데? 전화번호도 없어지고, 은행계좌도 동결인데?

할 수 없이 마사미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일부러 이런 거 처리하려고 퇴거 후 3박 4일이나 호텔에 머물다 출국하는데 내가 일본을 너무 우습게 봤다. 적어도 한 달은 걸리는데…

이사 가는 날 모든 한방에 다 해결하는 K-시스템, 만세다!!!

매거진의 이전글 긴장이 풀렸나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