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나라에서 살기 시작하다 1

쉰 살의 유학일기 - 여름편 #1

by 히토리

호텔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

1년 살이 짐을 싸야 한다는 생각에 산 3단짜리 이민가방은 겨우 한 칸도 채 채워지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이미 집을 구한 상태여서 부피가 큰 겨울옷들은 우체국 택배로 보내놓았고 짐가방에는 여름옷과 여벌 신발 한 켤레, 화장품, 액세서리 정도만 챙겼다.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물건을 구입할 때 ‘나중에 일본 가서 사자’ 하며 미루어 왔기 때문에 갖고 있는 물건 자체도 별로 없었고 온 가족이 이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서 소형 가전제품도 가져갈 것이 없었다. 어차피 전압도 안 맞아서 쓸 수도 없겠지만.

괜히 끌고 다니기 번거로운 흐물흐물한 이민가방 한 개와 백팩 하나, 이게 전부다.


괜히 산 이민가방. 한칸도 채 채워지지 않아서 안에 넣은 짐이 훌렁거려 밴드로 꽉 묶고 다녔다.


일본에 도착 후, 삿포로의 가장 번화한 거리인 스스키노에 있는 호텔에서 이틀을 묵었다.

공항에서도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고 내가 살 집과도 트램으로 한 번에 갈 수 있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집을 들락날락하며 자잘한 일을 처리하기도 편했지만 이 호텔을 예약한 가장 큰 이유는 대욕장이 있기 때문이다.

소박한 노천탕도 있어서 일본살이 전 관광객 모드로 피로와 긴장을 풀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관리회사에서 집 열쇠를 받아온 날 밤, 비 내리는 노천탕에서 비를 맞으며 온천욕을 했다.

내일이면 내 집에 입주를 한다. 나는 이제 일본에 ‘놀러 온’ 게 아니라 ‘살러 온‘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랑벨호텔 스스키노 노천탕. 사진출처 Agoda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어제 니토리에서 침구와 수건 등을 미리 샀다.

니토리는 삿포로에서 시작된 일본의 인테리어 및 생활용품점인데 이케아와 비슷하다. 본사가 홋카이도에 있어서 그런지 홋카이도에는 이케아가 없단다.

어차피 짐 때문에 택시로 이동해야 하니까 가볍고 부피 큰 물건을 이민가방에 빵빵하게 쑤셔 넣었다.

택시기사님은 나이가 꽤 지긋하신 분이었는데 택시 안에 귀가 어두워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으니 양해바란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땡큐, 파파고 ^^)

내 짐을 봐서일까, 나의 일본어가 어눌해서일까, 친절해도 너무 친절하신 기사님은 내게 이사하는 거냐고 묻더니 가는 내내 내가 살 동네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설명했다.

여기는 우체국, 여기는 마트, 여기는 은행, 여기는 어쩌구 저쩌구…

기본요금이 670엔인데 일본택시는 빨리 안 달린다. 정해진 속도를 절대 준수한다.

게다가 오만 신호등 다 걸리고, 보이는 보행자들에게 다 양보하고, 보이는 가게들 다 설명하고…

기사님, 그냥 제가 알아서 찾아보고 살 테니 얼른 가주세요, 요금이 겁나게 빨리 올라가요… ㅜㅜ

2km, 5분 거리에 택시요금 1,230엔… 다시는 안 타!


집 앞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내가 살 집은 6층짜리 건물인데 입구에 공용현관이 있다.

보안을 위한 오토락 기능이 있는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30년이 다 된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요즘 새로 지은 최첨단 아파트에 가면 헤매는데 여기는 일본 아닌가?

인터폰을 보니 집 번호를 누르고 호출하면 안에서 열어준다는데 나는 빈집이라고…

관리회사에서 열쇠와 함께 준 두툼한 안내서를 뒤졌다.

파파고 이미지 번역을 십분 활용하여 샅샅이 뒤졌는데 비밀번호 안내도 없고 들어가는 방법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관리회사에 전화해서 공용현관문을 못 열겠어요라고 말했는데 길고 긴 말 중에 내가 알아들은 말은 ‘鍵(열쇠)’ 뿐이었다.

그건 집 열쇠잖아, 여기 열쇠는 안 줬잖아… ㅜㅜ

응? 혹시… 인터폰 번호버튼 옆의 열쇠구멍에 집 열쇠를 넣고 돌렸더니 열렸다!!


인터폰의 열쇠구멍에 집열쇠를 넣고 돌리면 자동문이 열린다. 이게 반자동이지 자동이냐고…


참, 디지털도 아니고 아날로그도 아닌 뭔가 애매한 시스템이다.

30분을 넘게 헤매다 겨우 내 집 문을 열었다.


찰칵!


열쇠가 걸릴 때의 그 소리와 손맛이 경쾌하다.

일본에 놀러 오면 화장실 같은 곳의 문을 잠글 때 열쇠와 자물쇠가 딱 맞아떨어지는 그 디테일함에 항상 놀라곤 했는데 역시 아날로그의 나라답게 열쇠 하나는 끝내주게 만드는 것 같다.


집은 온라인으로 봤을 때와 똑같다.

청소도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퇴거할 때 청소비 22,000엔을 내야 하는 이유가 있네.

바닥뿐 아니라 유리창, 창틀이며 전등갓, 레인지후드까지 반짝반짝하다. 하수구는 마개마다 랩으로 막고 소독완료 스티커까지 붙어있었다.

도배를 새로 했는지 벽에 못자국도 하나 없다. 혹시 못 박으면 퇴거할 때 돈 받으려나? 아니면 청소비에 원상복구비가 포함되려나?


이제 여기에 삶을 채워 넣어야지.

온기를 담고 나의 희로애락을 담아야지.

잘 부탁한다. 나의 sweet home.

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