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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의 딸 Aug 24. 2019

1. 캐나다 이민병, 걸렸으면 가라  ​

이주공사와 유학원이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

캐나다에서 한인들이 많이 몰려사는 밴쿠버.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아 이민자들은 이곳에 정착하기를 바란다. 밴쿠버 제리코 비치의 맑은 하늘.


탈출 준비


        회사 선배가 야근을 서다가 문득 사무실 주변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앉아서 야식을 먹는 사람들, 사무실에서 밤에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들…. 그런데 늘 보던 그 모습이 갑자기 갑갑해 보이고 앞으로의 똑같은 날들이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고 한다. 홀몸도 아닌데 말이다. 윗 세대들이 보면 ‘배불러서 하는 소리’거나 ‘나가봐야 별 것 없다’는 말로 사표를 쓰려는 사람들을 말렸을 것이다. 술이나 한 잔 마시면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거나, 아니면 나갔을 때 ‘명함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채우다가, 회사 욕이나 힘들어지는 업계에 대한 우려 등으로 마무리 되며, 결론 없는 술자리가 끝났을 것이다. 그 선배는 그런 생각이 든 후 바로 사표를 썼다.  


        나의 11년 간의 회사생활은 어찌보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다. 10년이 넘으면서 고민스러웠던 부분들이 점점 퇴적층처럼 쌓여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일들이었다. 특별한 사명감도 없이, 깊이 쌓이는 지식도 없는 채 나이만 계속 먹는 것 같았다. 하루종일 뭔가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뚜렷한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난 그 퇴적층처럼 쌓인 나의 고민들과 불만을 폭발시켜줄 불씨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나는 불의에 항거하다가 회사에 반대해서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면 승진에 누락되어서 불만을 품고 ‘보란 듯이’ 나갈만한 그렇게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만약에 사표를 쓰고 나가면 “왜? 걔가? 무슨 일 있었대?”라고 잠시, 아주 잠시 몇 일 관심을 받다가 사라지는 먼지같은 존재였다. 경쟁사에 고액의 연봉으로 스카웃 되는 것이 아닌 이상, 남들은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정말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많은 사표를 준비하거나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착각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때로는 자신이 연예인이 된 것처럼, 또는 정치인이 된 것처럼 나의 사표가 세상에 큰 울림을 전하길 바라는, 또는 그럴 것이라 믿는 직장인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수많은 전직 선배들이 그랬듯이, 누군가의 사표는 그저 몇 일 동안의 놀라움일 뿐이며 곧 회자되고 사라질 소식에 불과하다. 연예인들의 포털뉴스 장식처럼 몇 시간, 몇 일만에 사라질 뿐이다. 자신의 사표를 세상을 바꾸는 목적으로 사용하진 말자.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사표는 치밀해야 한다. 정말 나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생각을 하고 알아봐야 한다. 모르면 다른 분야 사람들에게 물어 봐야 한다.


        한 40세 공공기관 부서장이 박사과정 학생과 연구자들이 주로 모이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앞으로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가끔씩 정책토론 때문에 만나는 교수들을 볼 때마다 부러워 예전에 못 다한 박사과정을 마치기 위해서 공공기관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떠나겠다는 내용이었다. 신랄한 댓글들이 달렸다. 월 150만 원도 되지 않는 시간강사 자리도 못 구하는 박사들이 모인 곳에서 너무 배부른 이야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금부터 5년 걸려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들 지금 누리고 있는 직장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조언도 나왔다. 물론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을 그리워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처와 자식들에게는 가장의 꿈이 예기치 못한 불행의 시작일 수 있다.


        29세일 때의 나는 바빠서 서른 살의 의미를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가슴아프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노래는 노래였다. 난 아이도 낳았고, 일도 바빴다.

         그러나 39세의 나는 달랐다. 사춘기도 아니고, 사십춘기가 왔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50세에 이 삶을 잘 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그 때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할까’ 매일 혼자서 맥주를 몇 병씩 먹으며 혼자 취기에 들뜨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년의 삶에 접어들기 전 심한 가슴앓이를 했던 것 같다.


        고 3과 40세의 차이점이 있다면, 40세는 별로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내가 살아온 전공이나 직업을 바꾸기도 여의치 않고, 갑자기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마음은 방방 뜨고 있었다. ‘아,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내가 얼마나 후회할까’ ‘적성에 맞는 어떤, 그 어떤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계속 커졌다.

 

        그러다가 해외취업을 꿈꾸며 계속 밤마다 검색을 하고, 찾아보기 시작했다. 미국, 호주, 캐나다, 일본, 싱가포르,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다시 미국…. 어딘가에 내가 갈 곳이 있을 거야. 꼭 떠나서 멋있는 삶을 살고 말 거야. 그래,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편이 나아. 그렇게 나의 마음은 이미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 대기줄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고, 아무도 부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어딘가로 가자”는 마음만 정했다.

        어느 동남아시아 근로자가 한국에 연락해 “저 취업하고 싶은데요”라고 어눌한 한국어로 취업의사를 밝혔다고 한들, 진지하게 채용하려 하는 한국기업은 드물 것이다(간혹 필요에 따라 있을 수도 있을테니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겠다). 그러나 나는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다.

 

        캐나다로 가면 취업비자를 받아 1년 정도 일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주권을 신청해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주공사들이 취업을 알선하고, 취업비자(워크퍼밋)만 받아도 아이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한 번 가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캐나다에서의 삶을 상상한 것이다. 캐나다는 몇 해 전, 가족여행으로 서부의 록키여행을 가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나는 가야만 했다. 그곳으로 가야만, 우선 한국을 떠나서 새로운 도전을 해야 된다고만 믿었던 것이다.

 

        부모님께는 애들 영어공부도 시킬 겸 떠나보겠다고 운을 띄웠다. 어머니는 “애들 공부에 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더니 왜 갑자기 영어공부를 시키겠다고 하는거냐”고 했고, 아버지는 “멀리서 행복을 찾지 말지. 살아보니 별게 없더라.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네가 말하는 걸 보니 늦은 것 같다. 가서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라고 말을 줄이셨다. 말리는 남편에게는 “내가 일하겠다. 당신은 쉬어라. 1년 일하고 영주권까지 2년 정도 하다보면 애들도 영어공부하고 우리도 비즈니스 기회를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누군가 합당한 의문을 제기할 때는 “그러면 안 가면 되잖아”하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정말 그 당시는 내가 갑자기 대단한 서부의 개척자라도 된 듯 했다. 계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난 캐나다로 떠났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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