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은 관광도 못해보고 돌아왔구나
-이주공사가 책임지는 것은 ‘LMIA(고용성평가)’ 서류까지
-이민을 간 것도, 안 간 것도 다 '내 탓'이다. 부모원망하지 말자.
LMIA를 천신만고 끝에 받게 되면, 그 종이를 들고 국경으로 간다. 캐나다 안에 있는 사람은 우선 캐나다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예전에는 육로로 자동차를 타고 가서 미국 국경에서 ‘플래그 폴링(Flag Poling)’이라는 것을 했다. ‘플래그 폴링’이란 국기가 꽂혀 있는 깃대를 돌아들어온다는 뜻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긴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우선 외국에서 다시 캐나다로 입국하는 형식을 빌려야 한다. 밴쿠버의 경우, 가까운 미국 시애틀 쪽으로 하루 정도 자고 관광하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거나, 이마저도 시간이 없는 경우는 국경 사무소에 가서 “저는 플래그 폴링하러 왔다”고 하면, 미국 땅만 찍고 바로 다시 캐나다로 유턴해서 돌아가도록 한다. 하도 플래그 폴링을 하는 외국인이 많다보니 아예 안내를 친절하게 해준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육로를 통한 플래그 폴링은 별로 권하지 않고 있다. 국경서비스를 담당하는 국경서비스(CBSA)에 LMIA서류를 내면 워크퍼밋을 발급해 주었는데, 서류를 받아든 사람에 따른 결과 편차가 너무 컸기 때문. 담당관 특유의 고집이 있다거나 트집잡는 사람을 만나면 본국으로 추방될 수 있다.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인데도 심사관의 개인적인 편견으로 워크퍼밋을 주지 않는 사례도 종종 들린다.
한 한국인 40대 남성이 식당 매니저로 일하겠다는 내용의 LMIA를 들고 캐나다 국경을 찾아갔다. 그런데 국경에서 만난 담당관이 이 남성에게 몇 마디 영어로 인터뷰 질문을 했다. 그런데 영어가 많이 부족했다. “너는 매니저급이라고 되어 있는데 나랑 의사 소통도 되지 않지 않냐. 영어실력이 부족하고 너의 이력서를 진실로 믿기 어렵다”며 그는 워크퍼밋을 거절했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민 관련 공무원의 재량이 크고, 이들의 판단과 결정이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강제력을 갖는다.
가장 큰 거절 사유로는 워크퍼밋을 받기 전, 현금을 받고 일했는지를 집요하게 추궁받았다가 걸린 경우다. 심한 경우 신청자의 휴대전화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거나 이메일 주소를 대라고 해서 고용주와 오간 내용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피기도 한다. 캐나다 정부에서 일하는 한국인 통역자는 우리 편이 아니다. 카카오톡 대화를 지우고 국경에 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용주와의 대화, 급여를 받으면서 일했다는 흔적이 나오는 순간, 강제 퇴거명령을 받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방법은 육로가 아닌, 공항을 통해 다시 캐나다로 입국하는 방법이다. 미국의 가까운 도시에서 하루 자고, 그 다음날 다시 캐나다 공항을 통해 입국하면서 워크퍼밋을 공항 사무실에서 발급받는다.
나 역시 몸이 캐나다에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워크퍼밋을 받기 위해서 미국 시애틀로 향했다. 비행기로 1시간 거리 밖에 되지 않는데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시애틀은 인구 구성이 완전 다른 것 같았다. 밴쿠버에서는 흑인을 보기 어려웠다. 미국은 흑인을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멕시코 사람들이었다. 반면 밴쿠버는 동양인이 많고 중국인들이 주류인 도시다. 동양인이 자신이 주류라고 믿으며 살 수 있는 도시 밴쿠버. 나라 국경 사이를 하나 두고, 도시를 채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르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캐나다와 미국은 서로 NEXUS라고 해서 미국-캐나다 사이에는 자동입국시스템이 있었다. 사전 서류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위험이 없는 여행자로 간주되면 미국-캐나다 국경을 아주 빨리 통과할 수 있는 혜택을 받는 시스템이다. 꼭 넥서스 카드가 없는 나같은 사람이더라도 캐나다-미국 공항에서, 사람의 이동은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밴쿠버 공항에서 표시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Welcome to the U.S.’라는 말이 큼지막하게 써져 있었다. 엇?! 나는 아직 몸이 밴쿠버에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싶었다. 알고 보니 밴쿠버에서 이미 미국 국경통과 심사를 하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 시애틀에서 내리면 그냥 바로 짐가방을 찾아서 나오는 구조였다. 예상치 못하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미국 입국심사관을 마주치니 긴장이 됐다.
미리 받은 미국 비자를 보여주니, 남자 심사관은 컴퓨터로 뭔가를 입력했다. 침묵이 흘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관광객으로 만나는 심사관과 뭔가 목적이 있어 만나는 심사관은 마음 자세가 다르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제복 팔 부분에 부착된 U.S. 로고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생긴 심사관은 “몇 일 동안 미국에 가냐, 가는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 “나 하루만 있다 와.” “왜?” “시애틀 하루만 보고 다시 돌아와서 캐나다 워크퍼밋 받아야해”.
그제서야 그는 활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미국에서 불법체류를 할 가능성이 없고, 캐나다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했기 때문일까. 미국인 입국심사관은 농담까지 했다. “왜~ 캐나다에서 일해. 캐나다보다 미국이 얼마나 좋은데. 미국 돈은 심지어 달러로 받을 수 있어서 더 좋아.” 칫, 내가 진짜로 미국에서 일하려고 하면, 얼굴이 정색했을 거면서. 모든 나라가 외국인들 많이 들어올까봐 걱정이 많구나 싶었다.
하긴 한국에서도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중국동포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고, 외국 난민들이 많이 들어와 한국을 망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지 않은가. 내가 그 반대 입장이 되고 보니 기분이 묘했다. 차라리 노동능력을 상실해가는 노인이라면 입국이 더 수월하다. 일할 곳이 없으니 관광으로 돈만 쓰고 돌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젊은 외국인 남자는 공사장에서 일할까봐 의심하고, 예쁘고 젊은 여자는 성매매나 윤락사업에 뛰어드려는 것 아닌지 감시받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줄도 짧게 서고, 호의적으로 한국 직원들이 대해주는 그런 곳은 내게 없었다. 내가 뭐라고. 이래서 조상님들이 힘들게 내 나라를 지켜내줬구나, 별별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렇게 두근거리며 미국으로 넘어왔다.
시애틀의 스타벅스나 퍼블릭 마켓 같은 관광지를 갈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예약한 공항 근처 모텔방에 짐을 풀었다. TV는 좋았다. 화질이 좋은 LG였다. 샤워를 마치고 모텔 앞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다. 워크퍼밋만 내일 잘 받으면,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과 아이들이 생각났다. 내가 잘 받으면, 이제 아이들도 공립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남편도 오픈워크퍼밋이 나올 것이다. 밤새 캐나다에서 늙어가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아이들은 영어를 잘 할까? 1,2년 뒤에 삶이 자리가 잡히면, 애들이랑 토론토도 여행가고 미국 동부도 여행가야지.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잠이 들었다. 하도 모텔방 TV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반복해서 들었더니, 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캐나다행은 아는 것이 없고 무식해서 감행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달 캐나다 살기’ ‘반년 캐나다 살기’를 통해 이민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안될 것 같으면 우선 아이들을 국제학생비자(인터네셔널)를 받게 해 동반으로 와서 상황을 살펴본다. 물론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들은 한국에서 출발 자체를 하지 못한다. 위험을 기피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마음 한 구석에는 ‘가볼 껄’ ‘그때 갔어야지’ 하는 아쉬움을 갖고 말이다.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니 각자 고민들이 많았다. 한 50대 주부는 15년 전 캐나다 이민을 오려고 했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해서 못 왔다”고 한탄스러워했다. 그 때 일찍 왔더라면 아이들도 한국식 발음이 아니라 멋진 영어를 구사했을텐데, 그 때 왔었더라면 캐나다의 멋진 자연을 누리면서 살았을텐데…. 좀 더 많았던 기회를 한국에서 살면서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시간이 있어서 남편이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고, 늙은 부모님과 오랜 시간 한국에서 함께 살 수 있었다. 혼자 고등학생 때 캐나다에 보낸 딸은 잘 커서, 캐나다 명문대에 입학도 했다. “딸이 초등학교 때 우리가 이민을 왔었더라면 영어를 더 자유자재로 구사했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고 50대 여성은 아쉬워했다.
이민자들은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한국에 갔을 때 80,90대 노모에게 “엄마, 나 엄마가 죽으면 그때는 장례식 안갈 거예요. 죽고 나면 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살아있을 때 서로 보자”고 말했다는 사람도 있다. 자영업을 하다보면 쉬는 날이 없고, 1년에 쉬는 몇일 동안 한국에 갔다 오기도 어렵다. 자연스레 부모와 소원해진 삶을 살게 된다. 때로는 간섭하는 부모가 보기 싫어서, 본가(시댁)과 관계가 좋지 않아 이를 회피하고 싶은 생각에 이민을 하나의 선택지로 삼은 사람도 있다.
누구 때문에 이민을 못 왔다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선택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 아닐까. 이민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다. 이 삶이 옳고, 저 삶은 틀린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기 원하는 장소를 찾아 자기가 선택한 것이다. 캐나다에서 자신은 육체노동이나 남들이 꺼리는 일자리에 뛰어들더라도 아이들과 맑은 자연에서 사는 ‘장소’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아무리 사는 곳이 공기가 좋아도 한국의 북적거리는 삶, 회사에서 인정받는 자신의 지위로부터 자존감이 높아지는 사람도 있다. 둘 다 다 가지면 좋겠지만, 그러기란 어렵다. 철망 안에 바나나를 손에 쥔 원숭이가 멀리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남탓만 해서는 안 된다. 바나나를 손에서 떨어뜨리고 다른 먹이를 찾으러 가던지, 아니면 바나나를 손에 쥔 자신에게 만족해야 한다.
‘OOO 때문에 못했다’라는 것은 자신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책임을 자신이 회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미국으로 아내와 함께 가서 자영업을 통해 재산을 불린 한국사람이 있었다. 아이들도 낳고 어느 정도 재산도 이뤘다. 물론 1992년 LA폭동이나 경기의 부침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고 했다. 외국인으로 자영업을 하려면 밤낮없이 긴 시간을 매여서 가게 일에 자신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런데 오랜만에 고국을 갔더니 한국에 그냥 남아 있었던 형제자매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경제적으로 한국이 부흥하면서 재산도 어느 정도 모았더란다. 그리고 부동산이 대폭 오르기 시작하면서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돈도 좀 벌었다. 괜히 미국에 가서 자기는 고생만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엄청 좋지 않았다고 한다. 먼 길을 자신이 더 돌아서 온 것 같은 후회가 마음에 남은 것 같았다. 물론 이 분은 근면성실하게 성공한 한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 있는 것 같다. 남의 잔디밭은 더 푸르게 보인다.
미국이든 캐나다이든 그 나라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권리인 영주권은 쉽게 주지 않는다. “1년만 일하면 그 경력 바탕으로 신청 가능합니다”라고 많은 이주공사가 광고한다.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첫단추인 LMIA서류까지만 받아준다고 명시한 경우가 많다. 직장을 소개해준다고 하면 돈을 더 받는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LMIA 서류를 들고 국경(인터넷으로 신청해 받는 경우도 많지만 시간이 수 개 월 더 걸린다)에 가서 워크퍼밋으로 바꾸는 과정도 개인의 몫이다. 그리고 그 워크퍼밋을 바탕으로 일을 시작해 1년 이상 일한 후, 고용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영주권 신청까지 가는 길도 쉽지만은 않다.
고용주랑 사이가 안 좋으면 새 고용주를 찾고 새 LMIA를 받아 워크퍼밋을 받아야 한다. 변수가 많다는 것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일한 경력 이외에 신청자 자신의 영어점수도 높아야 한다. 이 과정을 스스로 다 감내할 수 있는가. 나중에 영주권 신청 자격이 안 되거나 훨씬 장시간, 2~3년 일해야 조건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안 뒤에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왔으면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이주공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밤마다 헬조선을 떠나겠다며, 한국을 욕하고 한국직장상사를 욕하며, 한국에서의 미래가 없음에 욕만 반복적으로 한다면 그 사람은 10년 뒤에도 떠나지 못한다. 정말 간절하면 한국을 떠나라. 아니면 ‘투덜이’로 한국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