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육아 유감

자녀의 ‘영재적 모먼트’에 대한 환상은 어디서 오는가

계간 <민들레> 156호 기고

by 쓸쓸

* 교육 계간지 <민들레> 2025년 여름호에 실었습니다.



아, 이건 영재적 모먼트다


“제가 제이미한테 까까를 준 적이 있는데, 어느날 그 까까를 딱 받더니 까까 개수를 세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엄마 왜 이렇게 조금 줘요?’ 라고, 아기가 그걸 벌써 캐취해서 수를 이용하는 거죠. 아, 이건 영재적 모먼트다….”


최근 화제를 모은 코미디언 이수지의 “제이미맘 이소담씨의 별난 하루” 영상의 한 장면. 대치맘 이소담씨는 4살인 아들 제이미가 까까 세는 걸 보고 ‘영재적 모먼트’를 확신해 수학학원을 등록한다. 까까 좀 세었을 뿐인데 자녀의 영재성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는 나도 얼마 전 아이가 지점토를 조물락거려 만든, 빵빵한 볼에 양갈래 머리를 늘어뜨리고 토끼 귀를 단 괴생명체(?)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츄핑보다 더 귀엽잖아!” 그 순간 내 머릿속에도 ‘내 아이가 호…혹시?’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때가 되면 걷고 뛰고 한글과 숫자를 깨우쳐가고, 때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꼬마 화가, 가수, 과학자…. 나는 이들에 대한 경이와 감탄이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 이건 영재적 모먼트다” 라고 외치던 제이미맘의 감탄에는, 자라나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제이미맘 영상에 달린 한 댓글은 이랬다. “고1 모의고사 보기 전까지는 다들 자기 자녀가 서울대 가는 줄 안다.” 양육자들은 왜 자녀가 어릴수록 자녀의 재능이나 영재성, 또는 특별함에 집착하는가? 자녀의 ‘특별함’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는 일이 영유아, 초등 저학년 시기의 사교육 과열 현상을 설명하는 힌트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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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와는 구별되는 특별함에 대한 관심


‘영재’ 하면 과거에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높은 아이큐 검사 결과, 유아 시기에 미적분을 푸는 엄청난 속진학습, ‘실패한 천재’라는 풍문 등이 연상되기 일쑤였다. 오늘날 영재는 과거보다 친숙하고 흔한 이름이다. 1999년 영재교육진흥법이 통과된 이후 영재교육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영재학급, 교육청부설 영재교육원, 대학부설 영재교육원, 영재학교 과학고 등 영재를 교육하는 기관뿐 아니라, 수·과학융합, 수학, 과학, 미술, 음악, 정보 등 종류도 다양해졌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크게 유행한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은 한 줄 세우기 교육을 비판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수많은 영역 중 하나에는 영재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또한 영재를 유전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요인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게 되면서 조기교육, 조기개입에 대한 중요성이 확대되었다.


제이미맘이 제이미의 ‘영재적 모먼트’에 감탄할 때, 이 감탄의 뒷면에는 영재교육의 확대, 조기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확산이라는 사회적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영재적 모먼트’는 자녀가 (영재검사의 기준에 들어맞는) 영재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뿐 아니라, 다른 아이와는 구별되는 특별함에 대한 관심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사회가 인정하는 영재가 아니더라도, 내 아이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와 관심 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는 《단독성들의 사회》를 통해, 후기근대에 이르러 개인의 취향과 소비에서 정치와 경제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영역에서 단독성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단독성이란 “무언가 독특하고 상투적이지 않은 것을 추구하기 위한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다. 과거에 인정받아온, 평균적 사무직 근로자로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는 방식은 이제 순응주의로 비판받는다. 높은 교육수준과 경제적 능력을 지닌 신중간계급은 주거, 음식, 여행 등 삶의 모든 영역을 흥미롭고 매력적이며 특수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소셜미디어에 전시한다. 소셜미디어에서 드러나는 개인이 상투적이지 않고 더 독특할 때, 더 감정을 자극할 때, 주목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교육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산업근대의 학교는 보편과 평등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었고 모두가 똑같은 리듬과 방식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신중간계급은 자녀가 태어날 때부터 특수성을 지니도록 지원하며, 이를 위해 음악, 스포츠, 여행, 자연 등 다양한 체험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크비츠는 신중간계급을 대상으로 독특한 학교문화와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특별한 학교”의 유행을 교육에서의 단독화로 설명한다. 특별한 학교라니, 우리나라에서 학령기 인구 감소로 폐교가 속출하고 있음에도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비인가 국제학교가 유행하는 현실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레크비츠도 모르는 사실이 있으니,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의 단독화는 사교육 시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인격을 구현해갈 수 있도록 독특한 과외활동을 다양하게 제공하는 것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학교 바깥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교육을 경험하는 것의 요구가 커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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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마케팅이 아니라 기대 마케팅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서울에서는 비교적 학구열이 높지 않은 지역이지만 예상보다 많은 초등 1학년이 학원에 다니느라 바쁘다는 것, 학교 앞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에 놀랐다. 이 시기 아이들의 사교육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영어유치원을 졸업했다면 영어를 까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초등 연계 과정을 다녀야 하고 영어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시작해야 본격적인 입시 공부 전에 영어를 끝낼 수 있으니까, 수학은 연산‧도형‧교과‧사고력 등 각 영역을 골고루 꾸준히 연습해야 하니까, 요즘 애들이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하니 논술 하나쯤 다니면 좋으니까….


여러 이유로 학습 사교육을 다니는 경우도 많지만 초등 저학년까지는 예체능 사교육이 빠질 수 없다. 태권도는 이제 사교육이 아니라 동네 친구 사귀고 줄넘기도 배우고 생일파티도 하는 ‘K-보육센터’니까, 안전을 위해서 수영은 필수고 기왕이면 생존 수영이 시작되는 초등 3학년 이전에 배워두면 좋으니까, 축구나 농구를 잘해야 또래 집단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으니까, 악기 하나쯤 다룰 줄 알면 인생에 좋은 취미가 되고 연습 과정에서 성실함을 배울 수 있으니까…. 이 시기의 사교육 시장은 (입시경쟁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 마케팅보다는 (원하는 대로 자아를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 마케팅을 펼치고, 자녀의 사교육 가짓수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영유아/초등 시기의 사교육 과열 원인을 입시경쟁의 하향화 혹은 맞벌이 가정의 돌봄 수요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고 그 분석이 타당하지만, 그 분석 바깥으로 삐죽삐죽 빠져나오는 것들이 있다. 예체능 사교육은 입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돌봄을 위해서라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돌봄교실이나 키움센터로 해소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레크비츠의 통찰을 대입해보면, 우리 사회의 영유아/초등 저학년 사교육 열풍은 단독성에의 열망으로 일정 부분 해석할 수 있다. 양육자들은 자녀가 입시 경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독특한 개성을 지닌 단독적 개인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자아실현을 위해 어릴 때일수록 독특한 체험을 다양하게 할 수 있기를, 세계의 다양한 측면을 충분히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단독성 발현이 개인의 소망일 뿐 아니라 사회의 강제이기도 한 사회에서, 양육자들은 자녀를 특별한 인재로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단독성의 발현이라는 개념은 입시 성공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성취하기 쉽지 않다. 과거에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면, 혹은 공동체 내에서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면, 혹은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의 기준은 훨씬 복잡하고 불분명하며 주관적이다. 자신의 삶이 진정하다고 느껴야 자아실현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무엇이 진정성을 촉진할지 예측할 수 없고 그 기준마저 계속 변한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가 단독성의 발현이 될 때, 단독성의 기준이 불분명하고 이를 인정해주는 다른 이의 평가 역시 예측 불가능하기에 이 목표는 “구조적으로 실망을 생성하는 장치”가 된다.


“나는 내가 별인 줄 알았어요”를 들으며 우는 이들


“모든 아이는 특별하다”. 공동육아운동에 헌신했던 여성학자 박혜란의 책 제목이다. 이 캐치 프라이즈는 1등만 기억하는 입시경쟁에 대한 안티테제로 기능해왔다. 지금, 모든 아이는 특별하다는 말은 수많은 딜레마로 뒤덮여있다. ‘단독성들의 사회’가 어린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찬양과 만나, 자녀의 특별함을 키워주는 일은 점점 더 복잡한 과제가 된다. 제이미맘이 자녀의 ‘영재적 모먼트’에 감탄하는 사이, 영유아/초등 저학년의 사교육 가짓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사이, 자녀의 놀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 자란 이들은 자신을 향한 기대에 짓눌려 황가람이 부른 <나는 반딧불>의 첫 소절 “나는 내가 별인 줄 알았어요”를 들으며 운다.


레크비츠가 책의 말미에서 ‘규제적 자유주의’를 제안하는 것처럼, 교육 영역에 있어서 우리 스스로 특별함에 대한 기대를 ‘규제’할 수는 없을까.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로 이어지는 가사가 오히려 해방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특별함이 좋기만 한 게 아니라 때론 짐이자 부담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각자의 젊은 시절이 품었던 무한한 가능성이 불안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는 걸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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