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역할은 왜 점점 더 과열될까

계간 민들레 157호 기고

by 쓸쓸

*교육 계간지 2025년 가을호에 실은 글입니다.


'배타적 애정'을 강화하는 사회


유명한 평화주의자이자 엄마인 한 여성은 최근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아이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죽여버릴 거예요.” - 에이드리언 리치


아이가 영아였던 시절, 언제나 내 어깨 위에 작은 것의 무게를 짊어진 기분이었다. 늘 그 무게를 의식하며 밥을 먹고 장을 보고 잠을 잤다. 저 작은 것의 생사가 온전히 나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면 잠도 편하게 잘 수 없었다. 아이가 조금만 뒤척여도, 기침을 해도, 에어컨 바람이 약하거나 강해도, 잠이 달아났다. 이 감정의 이름을 사랑, 책임, 헌신 무엇으로 부르든, 이 혹독한 시절을 지나 나는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는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지켜야 할 대상이 있는 존재는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전에는 소중했던 것들이 후순위가 되기도 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를 위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폭력성이 발현되기도 한다. 아이와 다른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공상을 하다 화들짝 놀랐다. ‘다른 사람’의 자리에 누구를 넣어도 반복되는 결론을 마주한 순간, 내가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배타성이 어쩌면 양육의 본질 중 하나일 거라는 사실을 두려움 속에 곱씹었다. 그러니까 ‘배타적 애정’은 일부 양육자의 이기심이 아니라 양육이라는 짐을 맡은 이의 숙명이기도 하다고.


그러나 배타적 애정은 양육 친화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양육자의 희생으로 강화되는 자질이기도 하다. 어느 날 아이를 카시트에서 꺼내 안다가 발을 삐끗했다. 깁스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에 눈앞이 캄캄했다. ‘다리 깁스하면 애는 어떻게 보지. 남편은 휴가도 못 쓰는데…’ 나는 움직이지 못하는 발로 도로변에 주저앉아 울고, 아이는 검은 눈동자를 끔뻑거리며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키우며 느낀 ‘고립’을 생각하면, 그 장면이 가장 서늘하게 떠오른다. 내게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한 생명을 책임지는 무게를 나눠질 사람을 찾지 못하고, 좁은 아파트에서 나를 향한 아이의 전적인 관심, 시선, 감정을 끝없이 받아내며, 소중했던 관계와 정체성들이 흐릿해지는 일이었다. 작고 어린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고립감 속에서 나의 눈이 한없이 좁아지는 시간이기도 한.


물론 아이가 커가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양육자의 막중한 무게감은 옅어진다. 24시간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찾아갈 여유도 생긴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아이의 미래가 엄마에게 달렸다’는 절박감 속에서 이 독립의 시간을 유예하고 배타적 애정을 끊임없이 강화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특성 중 하나는 여성이 자녀의 성취를 통해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고, 가부장제와 학벌주의가 맞닿은 이 지점에서 엄마들의 자녀 교육을 위한 관리노동은 과열된다. 사교육 정보를 습득하고 학원 라이딩을 하며 ‘엄마표 영어’를 실천하는 등, 새로운 책무들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위한 ‘정성의 과학’


최근 더 라이프, tvN story에서 방영을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 <일타맘>은 한국 사회에서 양육자, 특히 엄마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타맘>은 자녀를 명문대에 보낸 일타맘 군단과 입시 컨설턴트가 나와 학부모의 교육 고민을 해결하는 프로그램으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의 시민단체는 이 프로그램이 학벌주의를 조장하고 과잉 사교육을 유발한다며 방영 중단을 촉구했다. 학벌주의 조장, 과잉 사교육 유발… 맞다. 그런데 내가 가장 경악한 부분은 전문가 패널 역할을 맡은 ‘일타맘 군단’이 자녀의 대학 타이틀로 불리는 것이었다. ‘S대’ ,‘Y대’ 등이 적힌 뱃지를 착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들이 발언할 때마다 ‘Y대맘’, ‘Y대&S대 의대맘’, ‘미국P대맘’, ‘S대&미국M대맘’ 등의 자막이 반복해서 뜬다. 이 기이한 장면은 뭐지? 자녀의 성적표는 부모의 성적표가 아니라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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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맘> 2회에 등장한 출연자는 초등학교 5학년인 자녀를 국제중에 보내기 위해 심야까지 빡빡한 공부 스케줄을 강행한다. VCR을 본 입시 컨설턴트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갖는 과잉 기대가 있어요. 아마 아이가 받는 성적표가 엄마의 성적표처럼 느껴질 거예요.” 입시 컨설선트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MC와 패널들을 보며 의아함이 커졌다.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일타맘 군단은 자녀의 성적표로 인해 방송에 출연하는, 아예 자녀의 성적표(자녀가 진학한 명문대 이니셜)를 훈장처럼 달고 있는 이들이 아닌가? 이 프로그램이 기획‧구성‧출연진‧자막 등을 통해 드러내는 메시지는 ‘아이의 공부와 대학 입시는 엄마가 노력하기 나름이고 아이의 성적표가 엄마의 훈장’이라는 것이며, 이 일관된 메시지 앞에서 패널의 발언은 힘을 잃는다.


일타맘들의 솔루션이 사교육 전문가와 차별화되는 지점도 있다. 이들은 사교육 전문가에 비해 정서적 안정감, 가정에서의 대화, 자녀의 성향과 기질에 대한 관찰 등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아이를 카이스트와 서울대에 보냈다는 한 일타맘은 육아는 보약을 달이듯 정성으로 대하면 과학처럼 방법이 있는 ‘정성의 과학’이라며, 아이의 아침을 챙겨주지 않는 출연자에게 아이와 대화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치고 있다고 질책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일타맘들은 자녀에게 공부만 강요하지 않고, 변화하는 입시 정보에도 능통할 뿐 아니라 아이의 정서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다. 그러나 이 ‘정성의 과학’은 생명을 기르는 과정에서 얻는 돌봄의 감각이라기보다는, 명문대 합격을 위한 수단에 더 가깝다. 이들은 명문대 합격이라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서적 건강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하며, 정서적 건강과 대학 입시가 양립 가능한 과제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일타맘>의 세계에서 자녀의 명문대 입학은 자녀의 공부법과 입시 전략은 물론 정서적 안정감, 화목한 가족 관계, 멘탈 케어 등에 있어서도 ‘성공’했음을 드러내는 증표다.


명문대 입학이나 사회적 성공처럼 자녀의 가시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성취를 목표로 하되, 이 과정에서 정성, 정서적 안정감처럼 비가시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방식과 아이 관찰, 입시 정보 수집‧분석 등의 과학적인 방식이 총동원되어야 하는(‘정성의 과학’)…, 이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엄마의 역할이 교육과 관련해 점점 더 복잡한 모순으로 가득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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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이 다른 생활들


올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와 나 모두에게 학교 앞 놀이터라는 새로운 삶의 공간이 열렸는데, 이곳에서 아이는 혼자 모래를 파다 우연히 만난 친구 뒤꽁무니를 따라다닌다. 나는 아이 옆에 보초를 서고 아이친구 엄마를 만나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드물게는 그들과 수다가 이어지기도 한다. 수다를 떨다 보면 ‘360도 다면 교사 평가’를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웃는 얼굴과 높은 솔톤 목소리로 인사를 해주는 옆반 교사와 비교하고, 교사의 잦은 연가 사용에 불만을 토로하고,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겉도는 아이를 위해 교사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의 평가가 때로 지나치게 냉혹하다고 느끼면서도, 그 기저에 있는 아이에 대한 사랑과 걱정을 이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 자체로 수많은 사건과 사고, 걱정과 우려를 넘고 넘는 과정이며,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는 이에게는 내가 정신 바짝 차려 아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종의 위기감이 있다. 이 위기감은 수많은 참사를 지켜보며 습득된 것이기도 하고, 한국인의 오래된 멘탈리티이기도 하다. (강준만은 늘 불안해하며 일상을 전시체제처럼 살아가는 한국인의 성향이 공적 영역에 대한 냉소가 바탕을 이루는 ‘6‧25 멘탈리티라고 정의한 바 있다. 공적 영역에는 불신을 보내되 사적 영역은 믿을 만한 연고를 키우며 자녀교육에 목숨을 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찬호 외, 《교육개혁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 창비, 2008, 27쪽) 그래서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돌아와서 혼자 갸웃거린다. 양육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시민으로서 크게 모자람 없이 살아온 그가 혹시 뉴스에서만 보던 진상 학부모는 아닐까? 아니, 실은 그가 교사에게 바라는 것들을 어쩌면 나 역시 직접 요구하지 않을 뿐 은밀히 바라고 있지 않은가?


밤이 되면 나는 이러한 요구를 일상적으로 듣는 교사의 증언을 통해 그의 고뇌를 실시간으로 맞닥뜨린다. 남편은 초등 교사다. 교직 생활 처음으로 (상대적) 저학년을 맡은 그는 최근 학부모와의 관계로 골머리를 앓았다. 나는 고립감 속에서 아이를 홀로 책임지는 상황에 놓이지 않았던 그가, 교육이라고도 돌봄이라고도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매일의 잡다한 노동을 통해 누군가를 키운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기를, 학부모들의 때로는 비합리적인 불안과 걱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가 아이의 어린 시절 엄마를 향한 수많은 평가와 감시의 말(“애가 손을 빠는데 뭔가 심리적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아이가 편식하는 건 다양한 메뉴를 해주지 않아서….”)에 둘러쌓여 있다고 느꼈듯, 그 역시 수많은 평가와 감시의 눈초리에 노출되어 있고 이러한 상황이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는 걸 안다. 20인분의 불안과 걱정을 상시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그의 일상에, “그 XX 미친 거 아냐?”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낮과 밤이 다른’ 생활 속에서, 나는 세상을 초등 교사인 남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가 아이 친구 엄마이자 주양육자의 눈으로 바라보았다가 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왜 학부모의 세계에는 상식 이하의 교사가 가득하고, 교사의 세계에는 진상 학부모가 가득할까? 두 세계는 협력으로 나아갈 수 없는 걸까?


2023년 한 젊은 교사의 죽음 이후, 교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악성 민원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책이 논의되었으며, 진상 학부모에 대한 비난도 거세졌다. 하지만 진상 학부모가 누구인가를 정의하고, 진상 학부모와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평범한’ 학부모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녀의 담임 교사와 다른 반 교사의 아이들 사진 올려주는 횟수를 비교하며,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기 어려운 사건에서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되었다고 생각해 흥분하고, “선생님이 나를 안좋아해”라는 아이의 말에 밤잠을 설치다 교사에게 톡을 보내는, 이들은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내게서도 멀지 않다.


한때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진상 부모 단골 멘트’ 1번이 “애 아빠가 화나서 뛰어온다는 걸 말렸어요.”이듯, 진상 학부모가 진상 엄마를 뜻한다는 건 우리 모두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는 증가했으나 여전히 육아는 여성의 일인 ‘지연된 혁명’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여성의 이중 부담과 좌절, 양육 친화적이지 않고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환경, 입시경쟁의 과열과 대리 성취에의 압력 등등과 맞물려 복잡하게 굴절되어 있다. 이 여성들이 피해자라고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사회 구조와 체제의 충실한 파수꾼’이며, 교육 생태계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인정받는 육아 방식(아이의 신체적 정서적 어려움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개입해주는, 아이를 위해 열심을 다하는…), 그리고 엄마로서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아이를 지킬 수 있어!’)은 진상 학부모 담론이 묘사하는 그것과 묘하게 닮아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다.


돌봄 사회로의 전환


이렇게 아이를 키우며 다방면으로 사적 열심을 내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공공성을 사유할 수 있을까? 엄마가 정서 관리, 학업 관리, 입시 정보 수집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하고 자녀의 성취가 엄마의 가장 큰 자랑이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나은 양육과 교육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진상 학부모 현상 뒤에는 여러 사회적 모순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지만, 나는 한국 사회에서 엄마로서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변화가 일어날 때 많은 부분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엄마 혼자 고립 속에서 아이를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면? 육아에 빈틈이 있을지라도 그 빈틈이 다른 이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메워진다면? 그래서 아이에게 과몰입해 배타적 애정을 강화해가지 않아도 된다면? “저는 엄마의 청춘을 바친 자식이에요”라는 <일타맘> 속 의대생의 발언처럼 ‘엄마의 청춘’을 바쳐 자녀의 성공을 이룬 케이스가 더는 칭송받지 않을 수 있다면? 이 변화의 과정에 어쩌면 한국 사회의 난제 중 하나인 입시 경쟁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씨앗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주장한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처럼 남성 역시 동등하게 돌봄에 참여하며, ‘커먼즈(commons)’처럼 핵가족의 폐쇄성을 넘어 서로 연루되어 돌보며 살아가는 관계들이 필요하다. 이상은 광활하나 현실은 여전히 ‘내 아이’의 필요와 요구에 매여있는, 나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온다. 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과 교육 생태계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필연적 갈등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더 나은 결론을 찾아가는 법을 여러 교육 네트워크 안에서 훈련하는 태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게 아니라 남성 역시 예외 없이 참여하는 태도, 서로의 육아 방식을 평가하기 이전에 ‘좋은 이모/삼촌’이라는 관계망이 되어주기를 작정하는 태도. 이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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