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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Nov 26. 2023

"애 설사하는 게 내 탓이야? 엄마는 나한테 왜 그래?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아이는 사시 수술 후 일주일간 항생제를 먹었다. 항생제가 독했는지 점점 변이 묽어지더니 설사를 계속했다. 아이가 설사를 한다고 하자, 엄마가 말했다.


“그러니까 유산균 처방이라도 받아오지 않고 뭐했니!”


돌이켜보면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은 후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 나의 육아를 가장 많이 지원해준 사람이면서, 동시에 나의 엄마 노릇에 대해 가장 많이 비난한 사람이다. 엄마는 아이가 감기만 걸려도 “네가 조심하지 그랬니”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엄마의 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건, 엄마가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가 손주가 너무 소중해서, 손주가 아픈 게 안타까워서, 자식을 잃은 경험에서 오는 두려움이 커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간호에 지친 나도 그날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애 설사하는 게 내 탓이야? 엄마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 유산균 처방해달라는 얘기까지 할 수 있어? 한두번도 아니고, 애 아플 때마다 왜 나한테 그래?”


설사 좀 한다고 애가 어떻게 되나, 이 정도면 됐지 뭘 얼마나 더 엄마 노릇을 잘하라는 건가, 왜 엄마는 내가 완벽한 엄마가 되기를 바라는 건가…, 엄마에게 쏘아붙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


나는 엄마로 뒤덮여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둘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123쪽


예전처럼 엄마의 압도적인 존재감이나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야 엄마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했고, 엄마에게 의존(육아 도움 받기나, 육아 도움 받기 같은 것들…)하는 걸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게 됐다. 엄마가 더 늙고 약해진 후엔 엄마가 나한테 의존하게 해야지 생각할 정도로 엄마를 사랑하게 됐다. 나는 그렇게 한 시절을 털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시절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된다. “네가 엄마 이해 좀 해줘”라며 어색하게 나를 끌어안던 엄마 목소리의 물기처럼. 


꽤 오래전 예약을 걸어둔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이 도서관에 들어왔다고 해서 빌려왔다. 비비언 고닉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책에서, 중년의 고닉과 노년의 엄마는 뉴욕 거리를 끊임없이 걷는다. 걸으면서 가족이 살았던 동네의 여자들 이야기를 하고, 싸우고, 서로에게 진저리치고, 또 만나 걷고, 또 싸우고, 서로에게 진저리치고…. 이 문장들에 나도 진저리쳤다. 


엄마는 당신이 이 생에서 얻고 싶은 것, 당신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것을 얻지 못했고, 그렇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의무로 여기며 불행이라는 먹구름 밑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시커먼 구름 밑에서 무력하게, 툭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동정과 연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남아있기로 했다. 누군가 엄마의 그 지독한 우울함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겐 폭력이 된다고 하자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의 입과 눈은 상처와 분노로 번들거렸다.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내 기분이 이런 걸 어쩌란 말이니. 나는 내 기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내심 당신의 우울한 상태를 예민한 감성, 강렬한 정서, 숭고한 영혼의 표시라고 여긴다.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194쪽 


“그래 맘대로 하든지.” 나 하는 짓이 어찌나 마음에 안드는지 목소리까지 떨린다. 엄마의 오만, 엄마의 경멸,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질. 절대적으로 엄마 곁에 머물러 있을 것들. 언어의 상징이요 존재의 숙어로 이것들이야말로 엄마의 자아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헤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아는 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이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309쪽


하지만 걷는 동안 주위 풍경이 변하듯, 둘의 관계도 예전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고닉은 다시 돌아간다면 아빠의 반대에도 일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는 엄마의 말에 놀라고, “인정 넘치게 지독하고, 후덕하게 짜증”(93쪽)나는 엄마의 말도 한 발 떨어져서 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은 이제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301쪽). 그리고... 다시 진저리나는 이 회고록의 마지막 장면. 


“왜 그딴 소리는 하고 난리야?” 내가 소리 지른다.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냐고? 또 사랑 타령이야? 아직도 사랑 운운이냐고. 나는 죽을 때까지 엄마한테 사랑 타령만 듣고 있어야 해? 엄마한테 내 인생은 안 중요해? 아무것도 아니야?”

(...) “나한테는 네 아빠 사랑밖에 없었어. 인생 살면서 누릴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했다. 아니면 뭘 어쩔 수 있었겠니?”

하지만 서로 상처만 주고 받고 끝내는 건 우리 식이 아니다. “아니, 그렇게 말한다고 달라지지 않아. 아빠 죽었을 때 엄마 겨우 마흔여섯이었어. 충분히 제대로 된 삶을 다시 살 수 있었다고. 엄마보다 훨씬 못 가진 사람들, 조건이 나쁜 사람들도 그렇게 했어. 엄만 그냥 아빠의 사랑이라는 개념 안에 머물고 싶었던 거잖아. 그게 미친 짓이었다고! 엄마는 30년을 사랑이라는 개념 안에서 살았다니까. 엄마도 삶이라는 걸 살 수 있었어.”

여기서 대화가 끝났다. 엄마의 애원은 바닥났다.

(...) 엄마가 침묵을 깬다. 이제 격한 감정이 거뒤진 목소리, 그저 호기심에 대답을 바라는 초연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면 엄마랑 좀 떨어져 살지 그랬니? 내 인생에서 멀리 떠나버리지 그랬어.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

나는 방 안의 빛을 본다. 거리의 소음을 듣는다. 이 방에 반쯤 들어와있고 반은 나가 있다. “안 그럴 거 알아, 엄마.”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316-318쪽


마지막 장을 덮으며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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