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자기계발서 같은 띠지 제목(“당신의 집중력을 구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라”), 베스트셀러라는 의심만 거두고 본다면 이 책은 굉장했다!
저자는 집중력 하락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핸드폰도 노트북도 없는 시골로 3개월간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들은 삶을 낭비하고 있어. 그 망할 놈의 핸드폰 좀 내려놔.’ 대신 ‘그 핸드폰 내놔! 내 거야!’(73쪽) 외치고 싶은 금단의 시기를 거쳐, 오랫동안 생각만 했던 소설을 쓰고, 요가를 통해 신체의 이완을 경험하고, 매일 꿀잠을 잤다. 이 책이 흔한 디지털 디톡스 체험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죄책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느림을 통해 신체의 이완을 느낄 때에도 이후에는 늘 죄책감이 끓어올랐다. 나는 생각했다. 늘 빠르게 달리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친구들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가 삶을 바꿔서 이런 기분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지? 갈수록 빨라지는 세상에서 어떻게 속도를 늦추지? 58쪽
나 역시 저자가 겪은 문제들-수면 부족, 만성피로, 성과에 대한 조급함, 단기 자극에 길들여진 뇌, 긴 호흡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현실-을 어느 정도 겪고 있고, 나름의 자잘한 대처법을 계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의 글은 개인적 해결책에 몰두하고 있지 않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시간과 주의력을 가능한 한 많이 소비할 수 있지?”(188쪽)라는 목표로 움직이는 테크 기업에 화살을 돌리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많은 부분은 테크 기업의 매커니즘을 설명하고 폭로하는 데 쓰였고, 나 역시 여기에 공분했다. “알고리즘은 그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영상을 더 오래 보게 만들 내용을 선택할 뿐이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말도 안되는 것에서 끝이 납니다.” 211쪽)
저자는 인류의 집중력 하락을 개인적 생산성의 문제보다는, 민주주의의 쇠퇴라는 관점에서 본다. (“우리가 우리의 집중력을 퇴화시키고, 복잡성과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능력을 퇴화시키고, 공유된 진실을 퇴화시키고, 우리의 신념을 음모론적 사고로 퇴화시킨면, 그래서 의제를 구축하고 공유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현재 전 세계의 가장 긴급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219쪽) 그리고 이 문제의 원인을 테크 기업뿐 아니라, 스트레스와 만성적인 각성 상태, 값싸고 형편없는 식단, 아이들을 신체적 심리적으로 감금시키는 교육 등의 더 큰 틀에서 찾는다. 저자의 대안은 세 가지다. 감시 자본주의 금지, 주 4일제 도입, 아이들이 (자기 동네와 학교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하기. 더 근본적으로는 이것들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근본적 힘인, 경제성장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그 선명하고 대담하고 타협없는 메시지에 감탄했고, 이 메시지에 도달하기 위해 저자가 보여주는 집요함에 뭉클했다. 관련 학자나 전문가, 활동가, 연루된 이들을 찾아 인터뷰하기 위해 미국 전역과 캐나다, 뉴질랜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횡단하는데 ‘그냥 이메일로 인터뷰하지 저렇게 다 찾아가나?’ 싶어 놀랍기도 부럽기도. (저렇게 이동할 수 있는 시간과 돈과 체력이라니!)
문제는 나였다. 그는 계속 이 집중력 쇠퇴를 야기하는 문제들은 개인이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데, 나는 계속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
그러나 잔혹한 낙관주의의 냄새를 풍기는 방식으로 이 증거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모습 또한 상상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게시물을 올리는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보세요! 먹는 음식을 바꾸면 집중력이 돌아올 거예요! 저는 해냈답니다! 여러분도 해낼 수 있어요! 하지만 진실은, (내가 이 책을 쓰면서 알게 된 다른 수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무엇보다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내 지인 중 나의 조부모님처럼 산과 농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부 슈퍼마켓에서 먹을거리를 구매할 수밖에 없다. 이 슈퍼마켓들은 값싼 가공식품으로 가득하고, 가공식품은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막대한 예산을 통해 우리에게 광고된다. 319쪽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인터뷰한 과학자들에게 계속 이렇게 묻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렇다면 어떤 제품이 이런 오염 물질이 들어있고, 어떻게 하면 그 제품들을 제 삶에서 제거할 수 있죠? BPA로 금속 캔을 코팅한다고 하셨죠? 앞으로 금속 캔을 피해야 할까요? 그러나 바르바라 데메넥스는 오염 물질로 가득한 풍경 속에서 개인적으로 오염 물질을 피하려 하는 것은 헛수고라고 말했다. 330쪽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관심은 저자가 말한 '잔혹한 낙관주의'(비만이나 우울, 중독처럼 우리 문화에 근본 원인이 있는 거대한 문제와 관련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언어로 단순한 개인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의 방식으로 정확히 흘러갔다. 힘있게 이야기하는 대안보다도, 개인적인 팁을 나열하는 장면에 집중하게 됐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그리고 ‘우리 아이가 이 시대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뛰어놀 수 있는 자연환경이 많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하나? 마을 공동체를 꾸려야 하나?’ 이런 물음표들로 흘러갔다.이 선명한 책을 읽는 방식이 이래선 안된다. 내가 잔혹한 낙관주의 속에 허우적대는 현대인이자, 당장의 해결 방식을 떠올리는 것에 자유롭지 못한 양육자라는 것을 문득 낯설게 깨달은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