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때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도서관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을 집어왔다.
2001년 5월 초판이 나오자마자 책은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11년 8월 `10주년 기념판`이 나올 때까지 10년 동안 미국에서만 150만 부 이상 팔렸다. 또 전 세계 1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올랐다. (...) 그러나 수많은 찬사와 수상 경력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이 책이 현실을 바꾸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일대를 비롯한 600여 개 대학의 필독서로 선정됐고, 수많은 지역 모임에서는 책을 대량 구매해 시 의회 및 주 의회 의원들에게 배포했다. 책 내용을 토대로 다큐멘터리와 연극도 만들어졌다. 이 책은 생활 임금 운동의 큰 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29개 주가 최저 임금을 인상했고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생활 임금을 지급하라는 법령이 통과됐다. 마침내 2007년 7월에는 연방 정부가 최저 임금을 인상하기에 이른다. 현재 미국 연방 정부의 최저 임금은 시간당 7.25달러이다. (노동의 배신 책소개글 중에서)
먼저 노동의 배신이다. 에런라이크는 저임금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목표는 객관적이고 간단명료했다.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매일 그러듯이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것.”(17쪽) 에런라이크가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확인한 것은, 육체노동이라고 해서 단순한 노동은 아니라는 것, 저임금 노동자들은 가방 검사, 약물 검사, 인성 검사, 잡담 금지 규칙 등 기본적인 시민권을 박탈당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 중간 관리자들은 자신들이 관리해야 하는 저임금 노동자들과 다른 계급/인종이라 그 범주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아서 먹고 살기가 아주 힘겨울 정도로 빠듯하다는 것.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에런라이크는 다양한 노동을 넘나들며 그야말로 ‘개고생’을 한다. 그 속에서 그는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는지 시험해볼 뿐 아니라, 자신의 심경을 관찰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 역시 흥미진진하다. 웨이트레스로 일하면서 “수유 호르몬인 옥시토신 주사를 한 방 맞은 것처럼 온몸에 서비스 정신으로 가득 찼”(36쪽)다가, 딱히 할 일이 없을 때에도 앉아있을 수 없게 하는 관리자들 때문에 요령피우는 법을 터득하고, 동료를 도우려고 무리해서 일한 동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고, “직업군으로서 청소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집단이고 우리가 보이게 되는 경우는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뿐”(140쪽)이었다는 걸 확인한다.
경험은 역시 힘이 세군.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가 저임금 노동자로서의 실험을 계속하면서도 자신은 방문자였을 뿐이었다는 걸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쓸 데 없이 비장해지지 않고, 자신이 저임금 노동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가장 확실한 차이점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생활하고 거의 평생 살아가는 그 세계를 나는 잠시 방문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얌전히 날 기다리는 은행 계좌와 개인 퇴직 계좌, 의료보험, 그리고 방 여러개짜리 집 등 중년에 이르도록 모아놓은 자산이 있었다. 그러니 실험을 한다고 해서 내가 빈곤을 ‘경험’하거나 장기간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는 기분을 진짜 ‘느낄’ 수는 없을 터였다. 17쪽
하지만 연극배우가 된 듯이 느껴졌던 그 순간에도 나는 자신을 억압된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년동안 평균 이상의 의료 혜택을 받고, 고단백의 영양 섭취를 하고, 1년에 400~500달러씩 내고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생산성 좋은 가짜 노동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지금까지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장기간 힘든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0쪽
이 책이 화제를 얻고 최저임금 인상 운동으로 이어진 후, 에런라이크는 또다른 실험을 시작한다. 화이트칼라가 대규모로 실직하는 시대에, 화이트칼라의 세계에 취업해서 화이트칼라 노동의 실상을 알아보는 것. 그는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대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화이트칼라 실업자를 겨냥한 ‘이직 지대’다. 커리어코칭, 네트워킹 행사, 교회들이 장악한 이 지대는 기도하거나 집중하는 정신적 노력만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구직자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비난하며, 찔끔찔끔 정보를 흘리면서 많은 돈을 요구한다. 이 이직 지대와 이직 지대를 떠받치는 통속 심리학은 화이트칼라 실업자들이 공통의 문제에 맞서지 못하도록 만든다. (긍정 이데올로기에 대해 파헤친 저자의 다른 책 <긍정의 배신>과도 연결되는 부분.)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이직 지대를 받치는 통속 심리학의 긍정 이데올로기에 저자가 진저리치면서도, 이를 직접 활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커리어코치에게 교육받은 대로 옷차림과 화장을 신경쓰고, “극도의 쾌활함 속 깊은 곳에 놓인 냉담함”(72쪽)을 장착한 채 커리어코치를 찾아간다. 자신을 고용해달라고.
나는 정말 야비해질 수도 있었다. “패트릭의 문제가 뭐죠?”라고 묻고, 신병 훈련소의 동료들이 가련한 케빈에게 그랬듯 “패트릭!”이라고 날카롭게 소리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계획을 고수했다. “신병훈련소에서 책을 쓰고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요. 책은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죠. 언제 출판될 예정인가요? 책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아요.” 나는 북 투어의 개요를 설명했다. <오프라 윈프리 쇼> 출연, 강연 예약, 월스트리트 실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오찬 강연 등등.
“정말 당신이 그런 걸 할 수 있습니까?” (...)
고속도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내내,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평화주의자가 느낄 법한 온갖 감정이 들끌었다. 자기혐오와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핸들을 잡은 손에서 끈끈하고 탁한 점액질이 흘러내렸다. 내 영혼이 내뱉은 욕설과 억제된 비난이 백색소음이 되어 도로를 채웠다. 146-153쪽
술술 넘어가면서도, 곳곳에 머무르게 하는 페이지가 많았던 책. 르포 형식의 글을 쓴다면 참고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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